매일신문

한국 유학 집대성…큰 족적 남겨

영주는 우리나라 유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에서 이웃한 안동에 전혀 꿀리지 않는다. 유학의 발흥과 중흥에 큰 족적을 남긴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과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등 3인이다. 영주시청 홈페이지 초기 화면에도 실려있는 이들은 바로 우리나라 유학의 생성, 발전, 융성의 각 단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고려시대의 문신인 안향은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인물이다. 1288년 충렬왕을 모시고 원나라 수도 연경에 갔을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필사해 들여와 이를 연구케 했는데 이것이 바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초라고 한다. 한국 역사상 근 600년간의 한국인 의식을 지배한 성리학이 바로 안향에 의해 발아된 것이다.

고려 충숙왕은 이러한 공을 기려 그의 사후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했는데 그를 모신 소수서원에 있는 초상화가 바로 그것이다. 국보 111호인 이 초상화는 고려때 문신 이재현(李齋賢)의 초상화와 함께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이다.

주세붕은 경남 함안 사람이지만 영주를 대표하는 역사인물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영주사람은 없다. 풍기군수로 있을 때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사립교육기관으로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원문화를 개화시켰기 때문이다.

백운동서원은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의 건의에 의해 중종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으면서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이후 소수서원은 공인된 사학으로서 풍기 사림의 중심지가 됐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서도 살아남았다.

정도전은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 국가에서 실현하려다 실패한 풍운아다.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도전은 우리나라 성리학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 '조선'은 어떤 형태로 통치돼야 하는가를 놓고 나중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과의 갈등 끝에 자신은 참살되고 집안은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게 된다. 정도전은 군신의 위계질서를 유지하되 신하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이방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쪽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후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역신'의 굴레를 벗지 못하다가 대원군때 복권됐다.

정경훈 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