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모(45.대구 달서구 상인동)씨에게 지난 봄은 기억하기도 싫은 시간이었다.
지난해 가을 건설 현장의 인부로 일했던 박씨는 허리를 다친 뒤 일을 쉰 탓에 수입이 끊겼다. 함께 사는 노모에게 변변한 밥상 한번 제대로 올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박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전기료를 못 내 단전돼 추위를 타는 어머니가 전기장판 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해가 지면 집안은 암흑으로 변했죠. 전기를 쓸 수 없으니 어머니의 전기장판도 소용 없었습니다. 추워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담요 한 장 더 덮어 드리는 방법 뿐이었어요. 냉장고를 쓸 수 없으니 음식보관도 어려웠죠. 하기야 보관할 만한 음식도 별로 없었지만요."
찬 바람이 부는 가을로 접어들면서 저소득층 가구들은 고민거리가 늘고 있다. 기름값 상승으로 난방비 걱정도 걱정이지만 전기료를 3개월 이상 내지 못하면 전기공급이 끊기기 때문. 몇 만원의 요금도 이들에겐 큰 부담이다.
지난 7월 넉달치 전기료 88만 원이 밀려 단전된 경기도의 한 주택에서 촛불을 켠 채 잠 자던 여중생이 숨진 일도 이들에겐 남의 일 같지 않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지난해 대구·경북 지역의 단전 건수는 모두 4만2천181건이었고 올해 6월 말까지 1만7천22건에 이르렀다. 하반기의 단전가정도 적잖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2003년부터 한전이 월 100㎾를 사용하는 저소득 계층에 대해 혹한기(12월~2월)와 혹서기(7~9월)에 단전조치를 유예해 주고 있다는 점. 단, 주거용인 주택용 전력 사용자에 한해서다.
또 지난 4월부터 저소득층에 110W의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소전류 제한기를 공급했다. 소전류 제한기는 최대 전력용량이 110W를 넘으면 자동으로 전기가 차단되도록 만들어졌는데, 용량을 넘으면 전기가 나갔다 몇초 뒤 다시 켜지지만 3번째로 용량을 넘는 경우 완전히 전류가 차단된다.
하지만 저소득층 가구들에겐 이같은 소전류제한기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형광등 2개(40W)을 켜면 14인치 TV(50W)도 켜기 힘들다. 전기장판이나 냉장고를 사용하려는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할 상황이다.
홀로 중학생 아들을 키우는 이모(46·여·대구 중구 남산동)씨는 형광등 조차 맘놓고 켜지 못하게 된 처지라 아들을 볼 면목이 없다.
"해는 점점 짧아지는 데 곧 전기가 끊길 생각을 하니 막막해요. 전기가 안 들어 올테니 공부하기도 어렵게 되겠죠. 하지만 무엇 보다 아직 어린 아들이 가난 때문에 상처받을까봐 제일 걱정입니다." 애써 담담한 그의 목소리엔 힘이 빠져 있었다. 최근 국감 현장에서 국회의원들이 전기불을 끄고 촛불로 대신한 것은 이들에겐 사치스런 이야기였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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