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대구 남산동에서 6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평생 결핵 환자들을 돌보는 사랑의 삶을 살다 간 김동한 신부가 친형이다. 선친은 옹기장수였으나 일찍 타계, 어머니가 옹기와 호떡을 팔아 키웠다. 일제 때 학병으로 끌려가기도 했던 김 추기경은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 시절에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 때는 밥 먹는 시간조차 아꼈다. 그만큼 신문사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톨릭시보를 경영할 때 김 추기경이 중구 남산동 대건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매일 들러서 직접 등사를 하던 장면은 이 학교 중장년 교사들이 그리워하는 추억 속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구독료를 받으러 각 성당으로 다녔다. 교회 문전에서 잡상인으로 냉대받아도 개의치 않았다. 번 돈은 전부 신문사에 넣고 단돈 1원도 가져가지 않았다. 생활이 힘든 직원에게는 몰래 도움도 줬다.

○…가톨릭시보를 만들면서 김 추기경은 사설을 거의 혼자 썼는데 가톨릭을 비판하는 주제도 심심찮게 다뤘다. 타 종교인이 비판성 원고를 보내와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게재했다. 주변에서 걱정하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지 않겠느냐"며 안심시켰다.

○…김 추기경은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 되기 전까지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스스로 권력을 내놓을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한 후부터 달라졌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유신 정치에 숨죽이고 있을 때 김 추기경은 인권과 정의를 말하기 시작했다. 유신 선포 한해 전인 1971년 성탄 미사에서는 박 정권의 비상 대권을 향해 가장 먼저 비판하기 시작했다. 1972년 8월에는 시국 성명을 통해 1인 장기 집권을 반대하면서 박 정권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런 김 추기경이 현 시국과 나라의 정체성을 걱정하는 충언을 했다가 이해찬 국무총리로부터 '종교 지도자인데 왜 정파적 발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매도를 당했다. 민주, 정의, 사랑을 위해 평생 노력한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양심'인 김 추기경의 우려를 집권 여당의 실세 총리가 오만과 독선으로 깎아내리는 현실에 대해 국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최미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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