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입장!"하는 사회의 선언을 신호로 한 인사가 얼른 단상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러자 "유신잔당 물러가라!" "통대선거 결사반대!" 등의 구호가 장내에 터져나왔다. 결혼식은 삽시간에 반체제운동으로 돌변했다. 1979년 11월 24일 오후 서울에서 있었던 'YWCA 위장결혼식사건'의 한 장면이다.
결사와 집회의 탄압을 모면키 위한 이런 기발한 위장풍속집회사건의 원조는 실은 89년 전의 대구였다. 1915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지금의 대구시 남구 대명동 앞산에 있는 안일암(安逸庵)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이날 서상일(徐相日)을 비롯한 이시영(李始榮), 박상진(朴尙鎭) 등 35명의 영남지역 애국유지들은 명절을 기리는 글짓기 시회(詩會)를 연다고 일경들을 속이고 실제론 '조선국권회복부흥단 중앙총본부'를 결성했던 것이다. 독립운동사에 널리 알려진 일명 '안일암사건'이었다.
사건의 주역이자 이런 위장집회 아이디어의 '지적소유권자'라 할 사람이 바로 동암(東庵) 서상일이었다. 1887년 대구에서 태어난 동암은 이에 앞서 1909년에는 김동삼(金東三) 안희제(安熙濟)등 80여 명의 동지들을 규합, 대동(大東)청년단을 조직했고, 경술국치의 해에는 '9인결사대'를 조직, 각국 공사에 선언문을 돌린 후 자결할 계획이었던 '9공사사건'을 벌였다. '안일암사건' 이후인 1919년에는 대구에서 3·1만세사건에 참가했으며, 이듬해에는 만주로부터 무기반입을 꾀하다 잡혀 투옥되었다. 1924년 이후에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면서 대구사회의 공청(公廳)이라할 조양(朝陽)회관을 건립, 계몽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한민당의 총무와 과도입법의원을 거쳐, 1948년 대구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내각책임제개헌안을 제출한 바도 있었다. 이 후 반독재투쟁의 길에 나선 그는 1956년에는 진보당창당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60년에는 사회대중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에 오르는 한편 5대 민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로선 사회민주주의정당 활동의 전성기였던 이 시기를 고비로 1961년에는 분열된 혁신세력을 모아 통일대중당을 발기했으나 5·16으로 무산, 이듬해 작고함으로써 다난한 정치일생을 끝낸다.
한국현대백년사에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건국투쟁기, 그리고 50년대의 민권수호기와 혁신운동기에 동암만큼 듬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을 대구는 물론 전국에서도 쉽게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대구사람들은 그를 회상하고 기리는 일에는 무신경에 가깝다. 일제하 무역업도 하던 그가 사업상 일인 상공업자들과 어울렸던 모습을 두고 '훼절 운운'하던 좌파들의 음해가 아직도 유효해서일까. 창씨개명도, 신사참배도 거부해온, '옹고집장이' 동암이요, 이승만과 타협했더라면 가시밭길 대신 총리 한자리쯤은 차지하고 남았을 거목이었다.
"동암과 같은 대구의 큰 인물을 대구사람들이 섬겨주지 않으면 누가 해 줘? 흔해빠진 기념사업회 하나 없는 것도 유감이지만, 후대들에게 업적을 알려줄 '동암전기' 하나쯤은 나왔어야 대구사람들의 체면이 설 게 아닌가. 다른 지방에선 동암보다 훨씬 쳐진 인물도 금쪽같이 떠받드는 세상인데 말이야."
해방직전 '단파방송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대구사범출신 독립운동가 고 송남헌(宋南憲) 민족정기명예회장이 곧잘 하던 탄식이다. 현실정치의 '널뛰기'를 보는데 지쳐, 흘러간 거인을 깜박 잊었다기엔 애향심이 유난히 강하고 앞장서길 좋아하는 대구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와서 보면 국민다수를 실망시킨, '별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던 YS나 DJ의 잘 나가던 한때를 보면서, 대구에서도 잠시 질시 섞인 '거목대망론'이 일곤 했었다. 하지만 가꾸고 아껴야만 거목은 자라거늘. 동암에 무심했던 예를 봐도 자성이 먼저여야 순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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