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어느 게이샤의 회고록이다. 몸이 예술이자 상품이었던 게이샤(예자/藝者)는 일본 상류사회의 꽃이었다. 경매로 재력가들에게 낙찰된 처녀성의 값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고 그들의 후원과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다. 꽃다운 나이에 중늙은이에게 매여서 유리 인형처럼 살아야 했던 그들은 가장 일본인다운 삶을 살았다.
"인간관계를 움직이는 것은 언어가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일본인들은 정서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쉽게 여기지 여기지 않았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일본인들의 정서 표현 특성들을 엿볼 수 있다.
영화는 아홉 살 난 소녀 치요가 팔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부모 자식 간 생이별의 감정은 갈 길을 가로막는 굵은 빗줄기가 대신할 뿐이다. 삶의 굴레에 무릎을 꿇는 가장의 비굴함과 딸을 팔아넘기는 비인륜적인 참담함이 교차하는 아버지의 표정, 이불 속에 몸을 숨기고 눈물만 흘리던 어미의 드높아진 기침소리가 이별의 세리머니 전부였다.
일본에서는 '말을 해버리면 귀중한 것이 파괴되고 만다'는 관념 때문에 상대를 확실히 믿기 전까지는 감정을 숨긴다고 한다. 어린 치요는 불행한 자기에게 자선을 베푼 회장님에게 홀로 사랑을 맹세한다. 치요는 최고의 게이샤 사유리로 거듭난 후에도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이런 저런 장애물이 있었지만 '말로 해 버리면 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까'라는 일본인의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신현상의 하나인 감정은 문화에 따라 표현되는 정도가 다르다. 동양에서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가슴에 깊이 묻어두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인지 홧병이나 신체 증상이 두드러진 정신신체장애가 더 많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한다는 식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당연시 여겨 말로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면 감정표현 불능증(alexithymia)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정신분석 치료의 경우에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면 저항으로 해석하는 등 언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유리는 사랑을 고백한다. 회장님의 품에 안겨서 울고 웃는 그녀의 표정은 어느 수려한 언어보다 모순을 안고 있는 양가감정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라는 고정희 시인의 '지울 수 없는 얼굴'처럼 게이샤 사유리는 이런 고백을 하고 싶었을까.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말로 후련하게 풀어내도록 독려하는 직업근성을 가진 나는 울면서 웃는 애매한 표현을 해석하려는 억척을 부리기도 했다. 만발한 벚꽃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는 모든 감정적 뒷정리를 관객에게 맡겨 버린다.
사유리와는 대조적으로 하치모모(공리 역)는 폭발하듯 말을 쏟아내는 인물이었다. 언어로 속내를 다 드러냈기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던가. 하치모모는 일본의 패전과 미군의 진주로 전통적인 일본인의 정서가 변해갈 것을 예고하는 복선이기도 했다.
마음과마음정신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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