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권주

'오랜만에/ 친구들과 동동주를 마셨는데/ 사랑방 아랫목에/ 삼복에도 무명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저 혼자 그윽하게 익어가던 못생긴 옹기 하나가 생각났던 것이다/ 종종 할머니가 마실을 가고나면/ 이불 한자락을 들추고/ 몰래 홀짝 마셔보던 그리움 한 쪽박/ ...'.

그랬다. 우리들이 처음 술을 만났을 때는. 사랑방 아랫목, 술독이 익어가는 향기를 맡으면서 가끔씩은 어른들이 집을 비운 사이, 그 향기로운 술독을 남몰래 탐닉하기도 했다. 그렇게 술을 만났다.

옛부터 잘못 배운 술버릇은 죽어서도 품고 간다고 했다. 최근 온 나라가 그 술 때문에 야단법석이었다. 술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라고 했다. 기성세대의 술문화가 이렇고 보면, 우리 아이들의 술 문화를 어떻게 야단쳐야 할지 고민이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친구 아들이 요며칠 날마다 술에 취해 들어왔다고 한다. 입학 첫날 부터 술판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대학이 꼭 술 배우러 가는 곳인가도 싶었단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술을 몰랐던 아들이 주는데로 받아 마셨다가 결국은 과음으로 길거리에서 구토를 하고, 몸도 가누지 못한채 늦은 밤 골목길 전봇대를 부둥켜 안고 허공에다 헛발질만 하고 있더란다.

그래서 입학 첫날부터 친구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잘못 키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고, 한편으로는 자식에게 큰 실망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작금의 우리 젊은이들이 만들어가는 술 문화인 모양이다.

돌이켜 보니 내게 술을 가르쳐 주신 할아버지가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집은 종가집인 관계로 한달에도 한두번은 집안 대소사가 있었는데, 그 때 마다 술을 한잔씩 주시면서 훈육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술은 잘 배워야 한다. 우선 어른들에게 잔을 받을 때는 무릅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야 한다. 마실 때는 살짝 옆으로 돌아앉아 소리없이 잔을 비워야 한다. 친구들과 마시더라도 술을 주고 받을 때는 반드시 예를 갖추도록 하거라. 과음은 금물이다. 술이 사람 하나 망치는 일 만큼 쉬운일도 없단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내 아이에게는 그렇게 가르치지 못했다. 요즈음 술로 인한 실행(失行)들을 보면서, 친구 아들이 입학 첫날 부터 고주망태가 되어 귀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라도 우리 고유의 술 문화를, 가정이 아니면 학교에서라도 기본적 예를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인지. 진정한 권주문화가 그리울 뿐이다.

김환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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