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움에 대하여
박상옥
십 년을 품고 다닌 수첩
여백이 없다.
지움은 고독을 끌어안는 일이며
망각의 숲을 걸어갈 예행연습이다.
만나서 반갑게 손을 잡고
수첩 채운 이름을
기억의 일선에서 후퇴시킬 때는
무언설법으로 피는 들꽃 이름을 불러보듯
한 번쯤 불러볼 일이다.
옷깃 스쳐간 향기 남아 있는 이름은
또 얼마의 세월이 덧없을지라도
지우지 말아야지.
세상 살다가 한 번쯤은
달려갈 수도 있는 일이니.
지움은 지우지 못하는
아픔이다.
인연의 기록인 수첩도 한 십 년이면 '여백이 없다'. 새로운 이름을 올리기 위해 혹은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 지워야 한다. 그러나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언설법으로 피는 들꽃 이름을 불러보듯/ 한 번쯤 불러'보면서 지운다.
물리적으로는 지울 수 있지만 한 번 얽힌 인연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차라리 '지움은 지우지 못하는/ 아픔'이 되어 가슴 속 깊이 묻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움은 고독을 끌어안는 일'이며 죽음의 세계인 '망각의 숲을 걸어갈 예행연습'인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이름을 입력하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는 디지털 시대 수첩의 '인연의 기록'은 그런 아픔도 휘발되어 버리지나 않았는지.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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