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중반의 대구는 인구16만의 도시답게 교육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제법 갖추고 있었다. 중학교 이상의 공립학교가 10개교, 사립학교가 4개교로, 학생수만도 5천 500명이 넘는 숫자였다. 이에 버금해 70여만권의 장서를 보유한 부(시)립도서관이 있었나 하면, 학원도시 대구에 걸맞게 중대형 서점, 문구점만도 네 군데나 있었다. 지금 동성로 1가의 오하시(大橋)서점과, 현 대안동(大和町)의 이또기찌(伊藤吉)상점, 모도마찌(元町. 북성로)의 미나까이(三中井)서적부, 그리고 현 서문로 2가인 혼마찌(本町)의 무영당(茂英堂)이었다.
대구 제일의 백화점이던 미나까이란 상호는 두 명의 나까에(中江)와, 한 명의 나까무라(中村)란 동업자의 성(姓)에서 '삼중'(三中. 미나까)을 따고, 다른 동업자인 오꾸이(奧井)의 성에서 '이'(井)를 따 보태, '미나까이'로 작명한 것이었다. 무영당도 점주인 이근무(李根茂)의 이름 가운데 '무성할 무'(茂)를 따, 꽃부리(英)가 무성한 나무처럼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한 작명이었다. 기원대로, 어느 대구사범학생이 1학년 때 보았던 50여 평의 점포가 졸업 때에는 100여 평으로, 몇 년 뒤엔 다시 2층까지 있는 작은 백화점으로 뻗어나 있었다.
1902년생인 이근무는 내로라 하는 일인 장사꾼들도 손을 들고 나왔다는 '개성깍쟁이'출신인데다가, 한 술 더 떠, 그 시절의 책방주인으론 드물게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한 알짜 개성상인이었다. 합자회사였던 오하시서점과 주식회사였던 미나까이 서적부의 사주가 일인인 반면 무영당은 조선인 이근무의 개인서점이었다. 자본력이 큰 일인들의 법인서점에 비해 조선인의 개인서점은 경쟁이 안 되는 듯싶었으나 사정은 정반대였다. 조선인 학생들이 학교 근처의 자잘한 서점에 들를 때를 제외하곤, 방과 후 번화가를 나들이삼아서라도 대부분 무영당을 찾아주었던 것이다. 같은 조선 사람의 서점이란 동질감 탓도 없진 않았지만, 무엇보다 이근무 점주가 꾸밈없는 친절과 공손한 자세로 학생들을 대해준, 뛰어난 접객수완이 주효했기 때문이란 사람들의 평가였다.
그는 고객의 기호에 맞는 서적을 딸리는 일 없게 구비해두는데 수완을 보였지만, 떨어져도 약속한 날짜 안에 꼭 구해주었다. 판금조치가 강화되기 전인 1930년대 초까지는 범칭 '사회과학서적'도 무영당에 가면 구할 수 있어, 대구의 청년'주의자'들은 재학시절에 이어 졸업 후에도 사상적 목마름을 풀어주는 문화공간으로 무영당을 사랑했다. '주의자'들이 즐겨 찼던 서적은 '가난 이야기' '자본론' '공산당선언' '조선전위당 볼세비키화를 위하여' '사회주의리얼리즘 창작방법론' 등과,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크로포토킨 등의 각종 저서, 기타 '프로문학' '일하는 부인'등 주로 일어로 된 좌익서적들이었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날로 기승을 떨쳐간 30년대 중반 이후, 이런 금서들의 판매는 물론, 보이기만해도 잡혀가, 더 이상 서점 주변에선 구하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2층의 한 코너는 전시장으로 쓰여, 화가들의 작품발표회도 잦았다. 아울러 '주의자'들끼리의 사교나 접촉공간으로도 무영당은 곧잘 애용되었다. '대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의 주역인 이상조(李相祚)가 이 곳을 찾은 유(兪)모란 청년에게 말을 걸어, 조직원으로 포섭했다는 일경의 발표 역시 온통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근무 역시 직간접으로 일경의 시달림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오야마 시게루(大山 茂)로 창씨개명해 대구상의의 회원이 되는 등, '충량한 신민'으로 행세하며 일제의 발악시대를 용케 버티어내었다. 또 '주의자'들이 가택수색을 당해 가끔 금서가 튀어나와도 딴 데서 샀다며 이근무를 감싸준 덕택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구 제일의 무영당 거리가 어느덧 한적한 뒷길로 변했듯, 일제시절 그의 화려했던 한 시절도 돌아보면 한갓 덧없는 꿈이되고 말았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