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이지은 지음/ 지안출판사 펴냄

프랑스 혁명정부는 왕비 앙투와네트에게 "트리아농 궁에 남정네들을 끌어들여 질펀한 파티를 즐기던 왕비"라는 죄목을 갖다 붙였다. 얼토당토 않게 일곱 살 된 막내아들 루이 17세를 증인석에 세우고는 자식에게 성적 유희를 가르쳤다는 죄목까지 뒤집어씌웠다.

어이없는 사건의 발단은 텅플 성에서 빗자루로 말타기를 하며 놀던 루이 17세가 고환에 상처를 입으면서 시작됐다. 앙투와네트와 마담 엘리자베스는 의사의 지시를 받아 매일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붕대를 새로 감아주었다.

그러다 루이 17세가 가족과 격리된 이후, 그를 돌보던 열쇠공 시몬은 어느 날 아이가 침대에서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발견한다. 겁에 질린 아이는 엄마와 고모가 이것을 가르쳐주었다고 거짓말을 꾸며댔다. 그래서 아들이 법정에 출석해 엄마의 죄를 증언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크리스티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으며,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앤틱 감정 자격증을 가진 20대 후반의 젊은 저자가 지은 이 책은 15개의 그림을 통해 16,18세기 세계 문화 유행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사람들의 일상을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보여준다.

왕부터 귀족, 부르주아지, 서민, 하층민에 이르는 일상적인 희로애락의 풍경을 다채로운 풍속화와 실물 오브제 등 400개 가까운 도판과 함께 실었다. 그림 자료들도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진귀한 것들이다.

왜 공주조차 하인과 기사 등 수십 명의 남정네와 한 방에서 혼숙했을까. 왜 남녀 쌍쌍이 한 테이블에서 오붓하게 식사하는 것이 '쿨'한 유행이었는지, 왕궁에서도 변기용 의자에 앉아 서로 엉덩이를 내놓고 '볼일'을 봤다는데.... 이 책에는 역사책에서 보지 못했거나 잘못 알려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16세기 초엽부터 1789년 프랑스혁명기까지 300년 가까운 시기는 프랑스 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움을 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폼생폼사'라고 요약할 수 있는'탐미의 시대'였지요. 요즘 눈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장식과 치장이 오늘날 프랑스가 세계 패션과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뿌리가 된 것입니다."

저자의 말이다. 이처럼 이 책에는 굵직한 정치사나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대신 화려한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었고, 어떻게 '볼일'을 봤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생을 즐기며 살았는지, 당시의 최신 유행은 무엇인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전문서적에 등장하는 딱딱한 예술사조의 변화 과정(르네상스-바로크 -로코코-신고전주의)이 관념적인 무엇이 아니라, 실제 가장 화려한 시대를 살았던 그네들의 삶 속에 어떻게 녹아든 것인지 실감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지을 때 양식이 어떻게 변했는지, 집 안의 장식물은 어떤 유행을 탔는지, 패션의 도시 파리에 사는 사람들의 치장은 어떻게 변했는지, 귀족들이 쓰던 고급스런 가구는 어떤 발전을 거듭했는지,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면서 과거 풍습이 어떤 새로운 풍습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등이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익히 아는 유명 인물의 뒷이야기와 실상도 역사에 대한 색다른 느낌으로 와닿는다. 난폭한 폭군으로만 알려진 '태양왕' 루이 14세가 한 인간으로서 남모르게 겪은 상처와 고독을 그의 하루 일과를 통해 세밀하게 보여준다.

'베겟잎 송사'로 루이 15세를 쥐락펴락한 간악한 후처로만 알려진 마담 퐁파두르가 실제로는 얼마나 헌신적으로 왕을 보필했으며, 탁월한 심미안으로 당대 예술의 발전을 뒷받침했는지를 얘기해 준다.

사치스럽고 무지한 왕비로 역사책에 희화화된 앙투와네트 왕비의 이미지가 어떻게 조작된 것인지, 그녀가 결국 아들의 증언으로 '음탕함'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아야 했던 운명이 가슴 찡하다. 그때 정말 그랬을까?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