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문을 찾아서] 산정무한(山情無限)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이다. 산 전체가 요원 같은 화원이요, 벽공에 외연히 솟은 봉봉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이다. 산은 때아닌 때에 다시 한번 봄을 맞아 백화난만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같이 우러러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문 형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꼭 쥐어짜면, 물에 헹궈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 수렴폭을 완상하며 몇 십 굽이의 석계와 목잔과 철색을 답파하고 나니 문득 눈 앞에 막아서는 무려 삼백 단의 가파른 사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로 탁 트인다.

여기도 해발 오천 척의 망군대(望軍臺)!-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峰)은 바로 지호지간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에 할거하는 영웅들처럼 여기에서도 우뚝, 저기에서도 우뚝,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밑은 천인단애 무한제로 뚝 떨어진 황천 계곡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단장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요원(燎原) : 불타고 있는 벌판.(요원의 불길)

벽공(碧空) : 푸른 하늘.

완상(玩賞) : 즐겨 구경함.

일망무제(一望無際) : 아득히 멀고 넓어서 끝이 없음.

지호지간(指呼之間) : 손짓으로 부를 만한 가까운 거리.

천인단애(千?斷崖) : 천 길이나 될 듯한 높은 낭떠러지.

무한제(無限際) : 끝도 없이 먼 사이

정비석(1911~1991): 소설가. 평북 의주 출생. 니혼대 문과. 1936년 '졸곡제(卒哭祭)'로 데뷔. 1954년 '자유부인'으로 유명세, 1984년 '소설 손자병법'이 베스트 셀러가 됨.

이제는 금강산 여행이 흔해졌지만, 예전 교과서에서 '산정무한'을 읽으며 도대체 금강산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그만큼 표현이 사실적이면서도 멋스럽다. 한 줄 한 줄 읽는 맛이 난다. 기행문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글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교과서 공부에는 신라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 이야기에 방점이 찍히기도 하지만, 그리 접근하면 그저 그런 기행문일 뿐. 표현 하나하나를 가슴 깊이 담아 두었다가 내가 다니는 여행 틈틈이 메모를 하고 글을 쓸 때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글쓰기는 그럴듯한 주제에 책상머리에 앉아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해 우리 국민들은 1인 평균 6.59회, 9.94일을 여행했다고 하는데 여행 감상은 과연 몇 줄이나 적었을까.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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