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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의 책] 엄마의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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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내가 살던 하숙집은 아침저녁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딸 넷에 아들 둘인 주인아주머니는 자식과 손자들이 안겨주는 즐거움보다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리는 일이 더 많았다. 그 중에서도 고등학생인 아들은 매일 용돈 타령에다 심지어 오토바이까지 사달라고 강짜를 부리곤 했다. 그 때마다 아들의 입에는 "엄마가 내게 해 준 게 뭐 있다고."란 말이 붙어 다녔다.

참 충격적이었다. 부모는 과연 어떤 존재이고, 자식은 또 어떤 존재이길래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가 부모가 됐을 때 자식에게 저런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참담함도 성급하게 떠올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만난 원유순의 책 '엄마의 무지개'는 그때의 느낌들을 고스란히 되살렸다. 자신의 이름으로 식당을 하는 엄마를 부끄러워하고, 여행비를 내러 학교에 온 엄마가 창피해 몸을 숨기고, 자신을 나무라는 엄마에게 '엄마가 뭐 해 준 게 있다고…….' 하며 대드는 딸과, 뒤돌아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엄마의 모진 인연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 책의 내용이 실감나는 것은 엄마의 이 같은 업보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정확하면서도 솔직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사람이라는 것을 자식들은 어머니가 되기 전까지 깨닫지 못한다. 고통도 모르고, 울 줄도 모르고, 끝없이 자식을 위해서 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닌, 한 여자가 아닌, 그저 어머니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사춘기 때 자신에게 신경 써 주지 않는 엄마를 참 미워했다는 작가의 화해법은 첫 아이를 가진 기쁨을 남편에게 전하는 엄마의 낡은 편지를 딸이 우연히 발견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며칠 전에 꿈을 꾸었답니다. 곱고 고운 무지개가 우리 집 지붕에 걸려 있는 꿈이었어요. 파란 하늘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얼마나 곱던지 한참 동안 바라만 보다가 꿈에서 깨었지요. 하도 이상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태몽 같았어요. 여보, 제가 곧 엄마가 된답니다. 당신은 아빠가 되고요. 여보, 저는 너무 기뻐서 그만 눈물이 다 났어요.'

이어지는 장면은 예상대로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돈 같은 거 하나도 없어도 돼. 엄마만 있으면 돼.' 하며 엄마를 찾아 빗속을 달려 나가는 딸의 모습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로 구성되고, 뻔한 표현으로 가슴을 때리려 드는 게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그 흔함에 있지 않을까 싶다. 부모와 자식 사이란 새로울 것도 특이할 것도 없이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온 가장 기본 단위가 아닌가.

딸아이가 읽고 제 엄마 아빠를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서점 서가에서 책을 집었지만, 내가 먼저 자식 된 도리를 하고 나서야, 부모 된 업보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읽힐 수 있겠다 싶어 슬그머니 숨겼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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