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식각성의 현장을 찾아서] (12)경주 현곡면 가정리 '용담정'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가 최제우(崔濟愚)의 마을이다. 최제우가 거기서 나서 자라고 득도해 동학을 창건했다. 마을 안쪽 집터에 유허비(遺墟碑)가 있어 그 사실을 알려준다. 건너 편 산에는 무덤이 있다. 구미산 속의 용담정(龍潭亭)은 공부를 했다는 곳이다.

유허비는 격에 맞지 않고, 무덤과 묘비가 너무 크다. 용담정을 새로 짓고 멀리 있는 입구에서부터 야단스럽게 치장했다. 성역화한다고 지나치게 꾸민 탓에, 구경거리나 살리면서 지나다니는 길손들은 최제우가 벼슬이 높아 존귀한 인물로 오해하게 할 염려가 있다.

그러나 현장을 망쳤다고 개탄하면서 물러날 것은 아니다. 그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연원과 현장을 증언한다. 최제우를 잘 알아 전하는 말이 많고, 최제우가 지은 가사를 외고 있다. 석비(石碑)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구비(口碑)를 따를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최제우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니 아버지 최옥(崔?)부터 알아야 한다고 했다. 최옥은 별 볼일 없는 시골 양반이었다. 과거 급제를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서울을 드나들었으나 열두 번 낙방하고 새재를 넘어왔다. 영남 산천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니 주막집 할미인가 빨래하는 노파인가 하는 이가 "당신이 눈물을 흘리면 열두 번 낙방한 최옥 같은 사람이야 자결을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자기 이름이 그만큼 났으니 과거를 더 볼 것 없다고 단념했다.

알아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하면서 최옥과 삼종간인 최림(崔琳)을 소개했다. 최림은 도술을 익힌 이인이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가난하게 지냈다. 먹을 것이 없다고 부인이 걱정하니, 쌀이 마당에 수북하게 싸이게 했다. 한 되를 퍼다 밥을 지어먹자, 쌀이 다 없어졌다. 들에 떨어져 있어 날짐승들이 먹을 것을 도술로 거두어 왔으니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고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최옥이 상처를 하고 지내다가 우연히 찾아온 과부와 인연을 맺고 최제우를 잉태했다. 최제우는 태어날 때 구미산이 세 번 울었다고 했으나, 서자라고 천대받고 어렵게 자라 나이가 들었어도 할 일을 찾지 못했다. 밖으로 나다니며 허송세월하다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오작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 듯하고", "불효한 이내 마음 비감회심 절로 난다"면서 한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득도를 해서 "만고 없는 무극대도"를 깨닫게 되었다고 '용담가'라는 가사에서 노래했다.

득도의 이유와 비결이 무엇인지 최제우 자신이 설명했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다. 득도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주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괴이한 말을 한다고 험담했다. '안심가'에서는 "용담에는 명인 나서 범도 되고 용도 되고 서학에는 용터라고" 하니 어처구니없다고 했다. '교훈가'에서는 "흉언괴설 남보다도 배나 하며" 다니는 이웃이 원망스럽다고 했다. 비방과 오해를 풀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옥과 최림, 두 사람의 경우와 견주어보면 무언가 크게 달라져야 했던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최옥과 같은 패배자가 되어 일생을 불만스럽게 보내지 말아야 했다. 더욱 불리한 처지가 되었으나 비약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최림처럼 도술을 얻고도 쓰지 못하는 것은 비약이 아니다. 개인의 능력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를 구하는 방책을 제시하는 더 큰 도술이 있어야 했다.

득도의 내력에 관해 전하는 이야기에서는 금강산에서 온 어느 도승이 전해준 천서(天書)를 읽었다고 한다. 최제우는 자기가 금강산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고 '몽중노소문답가'에서 말했다. 민족 수호신이 자리 잡는 금강산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다. 그 상징적 의미를 발현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다른 말을 했다.

"삼각산 한양 도읍 사백년 지난 후의 하원갑"에 세상인심 살피며 개탄하다가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갔다고 했다. 하원갑(下元甲)의 말세를 맞이해 삼각산으로 상징되는 조선왕조는 운수를 다했음을 알고, 삼각산보다 더 높고 신령스러운 금강산에 올라 상원갑(上元甲)의 이상적인 시대가 시작되는 후천개벽의 계기를 찾고자 한 것이다.

거기서 신선 같은 차림을 한 도사를 만나 깨우쳐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도사는 작품의 문면에서 무어라고 풀이하지 않았으나, 천지운행의 도수를 일러주며 민족의 영웅을 일깨우는 금강산 신령임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 깨달은 바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개탄지심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내보자.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십이제국 많은 나라가 괴질에 걸렸다는 말로 위기가 세계사의 범위에서 닥쳐왔다고 했다. 서양의 침략이 그 구체적인 징후였다.'권학가'에서는 "요망한 서양적이 중국을 침범"해서 생긴 사태를 직접 지적했다. 한문으로 쓴 경전 '동경대전'의'포덕문'(布德文)에서는 "서양이 싸워서 이기고 쳐서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망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그런데 천지운행의 질서는 하원갑 다음에 반드시 상원갑 좋은 시절이 오니 희망을 가지자고 했다.

'교훈가'에서는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라고 해서, 국제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의 질서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최제우는 안심하고 기다리며 마음을 바르게 가지라고 한 데 그치지 않고 지지자들을 모아 정치적인 변혁을 꾀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는 증거를 '검결'에서 찾을 수 있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 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넌짓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 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칼춤을 추면서 부른 노래여서 장황한 설명은 없고 영웅의 기백을 바로 나타냈다. "용천검"은 옛날부터 명검이라 일컫던 칼이다. "무수장삼"(無袖長衫)은 소매가 없는 겉옷이다. "시호시호"(時乎時乎)는 때가 이르렀다는 말이다. 산에서 도사를 만나 천지운행의 도수를 알고 자기 사명을 깨달은 영웅이 천하 명검을 빼어들고 춤추며, 어떤 적이라도 다 무찌르려고 달려 나가는 것은 소설에서 흔히 보던 바이니,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집권층은 이 칼노래에 가장 큰 위험을 느껴 최제우를 잡아 처형했다.

그 무렵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수탈을 가혹하게 한 탓에 사방에서 민란이 터져 나왔다. 서학(西學)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주교 때문에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더니, 서양에서 온 이상스러운 배가 근해에 출몰해 불안이 더 커졌다.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북경을 점령해 청나라를 굴복시킨 바로 그 해인 1860년 최제우가 득도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제우는 사회 내부에서 조성된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학에 대응해 동학을 창건했다.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채 의지할 데 없어 허탈에 빠졌던 민중은 최제우가 빈천한 이들을 위한 새 시대를 연다고 하자 누백 년 고대하던 진인이 이제 나타났는가 여기면서 주위에 모여들었다. 경상도 땅을 넘어서까지 신도들이 생겨나 교세가 확장되자, 조정에서 크게 우려해 탄압으로 맞섰다.

최제우를 경주 영문으로 연행해 한 차례 조사를 하고, 선전관을 파견해 체포하고, 경상감영에서 데려가 사형시켰다. 죄명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고 했다. 황탄한 잡술로 민심을 선동하며 난을 꾸미려고 은밀하게 당을 모은 것이 증거라고 했다. 뒤에 동학란이 일어나자 외세를 끌어들여 압살했다. 그런데도 동학은 없어지지 않았다. 거듭되는 시련을 견디며 역사를 움직이는 저류로서 큰 구실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최제우의 득도는 시대의 요청이고 민중의 소망이었다. 주도세력이 힘을 잃을 때 주변부에서 시대 전환을 가져오는 창조자가 나타나, 후진이 선진이 되고, 무식이 유식이 되는 이치를 구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최제우는 할 일이 없어 허송세월하고 있으면서 깊은 연원을 가진 창조적인 지혜를 이어받아 그럴 수 있었다. 궁극의 깨달음을 스스로 밝혀 우리 민족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다고 선포했다.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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