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재왕의 인물산책] 초대전서 만난 김세정 화백

'내 마음을 나와 같이/ 알아줄 사람은/ 경상도 그 청년/ 한 사람뿐입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는 이처럼 한 때 유행가 가사에 등장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수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경상도, 특히 대구·경북 사람 인기는 추락했다. 정치 환경이 변하면서 서울에서는 고향이 대구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도 조성됐다. 그래도 대구·경북에서 자란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특이한(?) 사람이 있다. 구상화를 그리는 김세정(金世貞·56) 화백. 지난 주까지 서울 롯데백화점 명품관인 에비뉴엘에서 초대전을 가진 김 화백을 전시장에서 만났다.

"기자님도 고향이 대구세요? 부인도 대구 사람입니까?"라고 잇따라 질문을 퍼붓고 그렇다고 하자 대뜸 "행복한 줄 알아라."고 한다. 억세고 애교는 없지만 위기 때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가문을 지켜내는 힘이 경상도 여인에게 있단다. 삼강오륜을 중시하며 자신을 희생해도 군말없는 은근과 끈기를 가진 여인이 경상도 여인이란다. 경상도 남자에 대한 찬사도 이어갔다. "믿음직스럽잖아요? 겉으로 표현은 잘하지 않지만 속 깊고 책임감 있지요." 듣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제일여중 미술부, 경북예고 1회 수석 입학,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미대 졸업 등 이력을 갖고 있는 김 화백은 서울에서 살지만 주소지는 지금도 대구로 되어 있다. 대구에도 집이 있기 때문이고, 대구시초대작가이기도 하고, 자랑스런 대구시민상을 받는 꿈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김 화백은 꽃을 그리고 사랑을 그린다. 노란색과 흰색을 즐겨 사용해 무척 밝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자기를 희생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그리지요. 저마다 가슴 속에 한 송이씩 꽃을 품는다면 세상은 온통 꽃밭이 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장미와 백합을 좋아했다. 나이가 차츰 드니 진달래(참꽃)와 개나리, 들꽃이 좋아졌다. 한겨울 내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아 잎도 나기 전에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참꽃이 특히 좋아졌다. 꽃잎이 얇아 투명하기까지 한 참꽃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전율한다.

화사한 그림만 본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젊은이일 것이라고 추측하기 십상이다. 이에 대해 김 화백은 "화가는 나이가 없다."면서 "화가가 죽고 나면 그 때부터 나이가 카운트된다."고 주장했다.

노란색과 흰색을 무모하도록 과감하게 사용하는 그의 독특한 그림은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첫 개인전 이후 그의 그림이 서울대병원에 걸린 것을 보고 모씨가 추천해 한국미술협회 이사가 됐다. 드문 일이다. 에스오일은 올해 김 화백의 그림으로 달력을 제작했다. 노란색이 많아 에스오일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시간만 나면 서울 집과 대구 집을 오가며 그림만 그리는 그는 올해 잠시 외도했다. 서울미술협회 추천으로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경기도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은 것.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경상도 출신 범띠 여인의 활달함을 가진 그는 몇몇 시장·군수의 공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케이스 하나. 모 시장 당선자의 경우 당초 공천에서 배제됐다. 하지만 그는 심사위원에게 로비를 하지도 않았고, 배제된 뒤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한 김 화백은 그의 공천을 강력하게 주장, 결국 공천됐다. 케이스 2. 한 공천 신청자는 당초 공천이 유력했다. 하지만 그는 새벽에 공천심사위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기본 매너가 없다고 본 김 화백은 그의 공천에 반대, 결국 다른 사람이 공천됐다. "성적 순으로 공천하는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배치 구도에 따라 달라져요. 정치도 아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천신청자를 살리고 죽이는 일을 한 탓인지 그림이 다소 격해졌다. 그래서 다시 평정심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만 1천 일을 피어온 들꽃을 사람들 가슴에 피워주고 싶다는 그의 꽃 사랑, 대구 사랑이 계속되기를 기대해본다.

최재왕 서울정치팀장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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