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숨 막힐수록 돌아가세요"…느림의 미학 '부채'

부채. 땡볕이 잔인하게 내려쬘수록 더욱 정겨워지는 단어다. 하지만 도시에선 이제 에어컨 바람에 밀려 '부채'라는 단어가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다. 진정 부채는 현대인들에게 불필요한 '과거의 것'일까.

◆잊혀져가는 부채

옛 선조들은 항상 손에 부채를 쥐고 다녔다. 단순히 더위를 쫓기 위함이라기보다 소유한 사람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재환 대구묵농회 대표는 "양반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거나 표정을 감출 때 부채를 사용했다."고 전했다. 단오절 때는 윗사람에게 상납도 했다. 올해도 부채의 살랑 바람처럼 잘 대해달라는 뜻이었다.

이렇듯 쓰임새가 많았던 부채였지만 지금은 현대 문명의 이기 앞에 초라한 모습이다. 서문시장에서 부채를 전문적으로 판 지 30년이 넘었다는 조중규(51)씨. 조씨의 가게는 이제 다른 가게 한켠에 자리할 만큼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조씨는 "한 때는 장사를 크게 했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 주문이 급속도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부채 수요가 준 것도 원인이지만 값싼 중국산이 대거 들어오는 것도 한 원인이다. 아직도 이 맘 때는 부채를 사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사람들. 조씨는 "가게가 점점 작아져 요즘은 주로 도매만 취급한다."며 "부채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도 좀처럼 찾기 힘들며 대부분 다른 물건을 팔면서 여름 한철 잠깐 부채를 판매하는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이재환 대표도 "지금의 부채는 점점 선물용이나 작품용, 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지압용으로 용도가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예뻐지고 있는 부채

시대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듯 부채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가볍고 부담 없는 플래스틱 부채가 나오면서 주로 길거리에서 쉽사리 건네지는 판촉물로 전락했지만 종류와 모양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온라인 부채전문점 싼타마을 조상철 실장은 "최근 디자인이 중시되면서 각종 기업체에서 실용적이고 눈에 확 띌 만한 부채들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단순한 모양의 부채에서 벗어나 별이나 아이스크림, 포도 등 다양한 모양들의 부채가 나오고 있다. 특히 합죽선의 특성을 이용한 3쪽이나 8쪽 부채 등도 나오고 있는 추세다. 부채도 점점 팬시 스타일로 진화하고 있는 것.

이런 추세와는 달리 오히려 전통 부채가 각광을 받기도 한다. 옛 멋과 함께 보존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 실장은 "최근엔 기업체쪽에서 합죽선같은 전통 부채를 원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했다.

대구녹색소비자연대에서는 22일 에너지의 날을 맞아 시민들에게 합죽선을 나눠줄 예정이다. 안재홍 대구녹색소비자연대 국장은 "플래스틱 부채를 나눠주면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아 들고 다니기도 편한 전통 부채를 택했다."고 밝혔다.

이재환 대구묵농회 대표는 "살랑살랑 부드럽게 부쳐야 시원함이 오래가는 부채는 '느림의 미학'으로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지적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정재호편집위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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