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일현의 교육 프리즘)논술과 계층이동

몸빼바지를 입은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사무실로 불쑥 들어왔다. 대구에서 멀지 않은 어느 소읍에 산다고 했다. 고2 아들이 지역 학교에서 1등을 한다면서 논술 공부는 혼자 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대구에 있는 몇몇 논술학원에 물어보니 모두가 40만 원 이상을 요구해서 포기했다고 말했다. 학원에 안 다니면 정말 안 되느냐고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엇을 제대로 예측할 수 없어 불확실성이 지배적인 분위기로 자리 잡게 될 때 변칙과 편법, 불법과 탈법이 활개 치게 된다. 현재 사교육 시장은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 심리, 조급성, 교육 정책의 불확실성,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의 가능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등을 생존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선행학습 붐은 지나친 경쟁심과 조급성을 상업적으로 활용한 것이고, 논술과 심층면접은 예측 불가능성이 주는 막막함을 가장 잘 이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현 고2가 대학에 갈 때는 내신과 수능성적은 9등급으로만 표기 된다. 내신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명문대들은 논술이나 심층면접과 같은 대학별 고사로 우수학생을 뽑으려 할 것이다. 대학별 고사가 아버지의 경제력과 어머니의 정보력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수능시험에서 480점(원점수 500점 만점)을 받을 시골 수재와 450점을 받을 서울 부잣집 아들을 예로 들어 보자. 2008학년도에는 두 학생 모두 1등급으로 표기되기 때문에 30점이라는 차이는 없어져 버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서울 부잣집 아이는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본고사를 칠 때까지 온 가족을 동원하여 유명 학원과 강사를 찾아다니며 논술과 면접 준비를 한다. 그러나 시골 수재는 인터넷에서 무료 맛보기 강의나 뒤적이다 별 체계적인 준비 없이 시험에 임한다. 시골 수재는 논술이나 면접시험에서 더듬거리다 떨어지고, 서울 부잣집 아이는 매끄럽게 글을 쓰고 논리정연하게 말을 잘하여 합격한다. 수능 30점의 차이가 역전되는 것이다. 논술과 면접시험은 학생이 성장 과정에서 겪은 지적, 문화적인 경험에 크게 좌우 되는 시험이다. 경제력이 핵심적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시골 엄마에게 관련 참고서 몇 권을 건네주며 학교 수업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강에서 친구들과 고기를 잡다가 저물어 오는 강둑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모습이 엄마 등 뒤로 겹쳐졌다. 현행 입시에서는 시골 수재의 풍부한 정서와 감성이 평가되지 않는다. 개천에서 용 나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계층이동 자체를 원천 봉쇄하려 드는 대입제도와 현실이 안타깝다.

윤일현(교육평론가, 송원학원진학지도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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