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법원, 일제 초기 고법 민사판결록 첫 편찬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직후인 1912년~191 4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판결이 수록된 '조선고등법원 판결록' 제2권 민사편이 18 일 처음으로 편찬됐다.

판결록에는 개화파정치인 박영효의 대여금 청구소송과 이완용의 토지 소유권 소송 등 당대 유명 인사들이 연루된 민사소송 판결 등 112건의 번역문과 원문이 함께 수록됐다.

특히 판결록은 일제 강점기 초반인 1910년대의 각종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법사(史) 뿐만 아니라 생활사의 사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판결 중에는 '을사오적' 이완용이 일본인을 상대로 토지 소유권을 놓고 다툰 소송이 단연 관심을 끈다.

일본인 A씨는 1912년 이완용을 상대로 전라도 부안군 일대 논 약 4천 마지기(약79만평)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1심 재판부인 경성지방법원과 항소심 재판부인 경성복심법원은 같은 해 11월 이완용이 문제의 논이 자신의 땅임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일본인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완용의 패색이 짙어지는 듯 했으나 상고심 재판부의 결론은 예상 밖이었다.

부안군을 관할하는 법원은 공주지방재판소인데 A씨가 부동산 소재지 관할 법원도 아닌 경성지방법원에 소송을 낸 것은 잘못이라며 고등법원이 A씨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각하해 버린 것.

이완용은 80만평 가까운 대지를 빼앗길 뻔 하다 이 판결을 계기로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친일파 이완용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왕을 상대로 낸 소송도 눈에 띈다. 비록 일제 강제침탈기이긴 하나 국가권력의 정점이자 국부로 섬기던 왕을 상대로 낸 소송이어서 눈길을 끈다.

판결록에 따르면 정모씨는 1914년 '창덕궁 이왕(李王)'을 상대로 낸 일종의 토지소유권확인 소송에서 패하자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당시 창덕궁에 살던 왕은 순종이었다.

정씨는 홍릉(명성황후의 묘)의 경계가 넓어지는 과정에서 자신 소유의 땅이 편입됐으므로 이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낸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묘의 내해자(경계안쪽)에 편입된 토지는 누구의 소유인지를 묻지 않고 당연히 왕실의 소유로 귀속된다"는 등의 이유로 상고를 기각했다.

판결이 있기 불과 4년 전 일본에 합병되기까지 순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였으나 판결록에는 초라하게 '창덕궁 이왕'으로 표기돼 나라 잃은 국부의 서러움을 그대로 나타냈다.

구한말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박영효(1861∼1939)가 안모씨에게 돈을 빌렸다가 대여금 청구소송에 휘말려 확정판결까지 받는 송사를 벌인 점도 이색적이다.

항소심에서 패소한 박영효는 조선고등법원에 "항소심 재판부가 증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억울하게 패소했다"고 주장했으나 상고심 재판부도 박영효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상고심에서 박영효는 항소심 재판부가 채택한 증거와 관련해 7가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복잡한 법리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패소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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