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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습니까] ①이의근 前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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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서지절(殘暑之節). 뜨거웠던 여름은 서서히 물러가고 어느새 가을이 문턱까지 다가왔다. 퇴임 두 달을 조금 넘긴 이의근 전 경북도지사의 아침도 조금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기자가 그를 찾았을때 이 전지사는 편안한 차림으로 푹신한 소파에 기댄 채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맨발에 노타이 셔츠 차림은 어쩐지 낯설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이삿짐들로 어지러운 서재도 그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빈틈없는 정장 차림으로 바삐 움직이는 모습으로만 비쳐진 탓일 게다.

"공직에 있을 때보다는 한결 느긋합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교회 다녀오고 운동하는 것은 똑같지만요. 무엇보다 어디 매인 몸이 아니잖습니까?"

실제로 요 근래 두어달 동안 그에게는 조그만 생활의 변화들이 있다고 했다. 우선, 신문 보는 시간이 확 줄었다. 예전에는 일어나자마자 10여 종에 이르는 신문을 샅샅이 챙겨봤지만 지금은 아침에 3개, 오후에 1개만 본다.

"주로 읽는 지면도 정치·경제에서 문화·종교·사회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니 관심사가 달라지더군요." 최근에 읽은 것들이라며 건네는 책들도 다양하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 쥐가 고양이밥을 먹다', '세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 보내기는 그가 새로 익힌 '혼자서 살아가기'의 하나다. 사실 그는 휴대전화가 대중화되는 동안 철저히 소외(?)됐다. 전혀 본의는 아니었지만. 지금도 개인비서는 있으나 대부분의 일은 직접 처리한다. "먼 곳은 서툴러서 못해도 가까운 곳은 손수 운전합니다. 동네 상가에도 한번씩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삽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에 가서 지하철 타는 법도 배웠습니다. 허허"

물론 당황스러운 일도 종종 있다. "한번은 동네 목욕탕에 갔어요. 그런데 그 날 따라 목욕티켓을 안 가지고 간 겁니다. 카운터 아가씨에게 나중에 티켓 가져다 주겠다고 하니까 안된다는 거예요. 어쩝니까? 다시 집에 와서 가져갔죠. 아마 절 모르는 분이셨겠지만 조금 황당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유명인사다. 민선 지사 12년 동안 매스컴에 등장한 횟수만 해도 수만 번은 족히 되지않을까. "아침에 운동 나가면 주민들께서 손을 잡으시면서 커피도 권하고 사인도 해달라고 그럽니다. 각종 단체에서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다 못해드려 죄송할 뿐이지요."

그는 퇴임하자마자 첫 일주일 동안 경주 한 호텔에 머물렀다. 제주도와 미국에 있는 두 아들, 창훈(38)·광훈(35)씨 가족과 함께였다. "며느리들이 제일 좋아했습니다. 특히 제 자서전에 등장하는 연애이야기에 관심들이 많더군요. 정말로 딸이 된 것 같다는 말을 들으니까 흐뭇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가족 이야기가 더 이어졌다. "두 아들이 모두 종교인입니다. 다른 일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본인들이 원해 말리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종교인이어서 제가 무사히 공직생활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3학년인 큰손자 녀석이 반장이 됐다고 그러더군요. 선거공약으로 뭘 내걸었냐고 물었더니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게 하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26대6으로 이겼다는 거예요. 참 기특하지요."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미소를 짓는 그는 손자재롱에 즐거워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일 욕심 많은 그에게 한가한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않았다. 벌써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기도 하다. 지난달 한국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운동) 대구·경북 이사장직을 맡은 데 이어 12일에는 대신대 총장에 취임했다. 이달 중에 중국을 방문, 새마을운동 전파에도 나설 예정.

"다른 대학에서도 요청이 많았지만 대신대는 특정 개인이나 기업의 대학이 아닌데다 학교측에서 봉사차원에서 학교를 맡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수락했지. 교회와 지역사회에 필요한 인재양성에 힘쓸 생각입니다."

이 전 지사가 욕심을 내고 있는 또다른 일은 '대경육영재단' 설립. 대구·경북 출신 인재들을 나라의 동량(棟梁)으로 키워내기 위해 기숙사인 '대경학숙'을 서울에 세우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대구·경북 출신 장관급 퇴임 공직자 모임인 대경회의 정해창 회장님이 함께 일하자며 연락이 왔습니다. 저도 민선 출마 직전 내무부 기획실장을 하는 동안 추진하다 무산됐던 일이라 흔쾌히 설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봉사와 후진양성이야말로 정말로 뜻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경육영재단 설립을 논의하기위해 상경할 채비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잔서지절(殘暑之節)은 느껴지지않았다. 어쩌면 그에게는 강렬한 햇살 가득한 성하지절(盛夏之節)만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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