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번이 넘는 패배. 지난 3월 야구월드컵이라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4강 신화'를 이룬 김인식 감독이 귀국 후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아직 생생하다. 그는 인터뷰에서 경제계에서조차 '신(信) 경영'으로 벤치마킹하고 있는 자신의 '믿음의 야구'는 "700번이 넘는 수많은 패배가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사실 김인식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 13년간 830승 40무 829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딱 5할의 승률이다. 따지고 보면 승리한 만큼의 패배를 기록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 출판사에서 자서전을 준비할 정도로 스타감독이다. 승리보다 더 값진 829번의 패배를 맛봤기 때문 아닐까.
느닷없이 김인식 감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스포츠에서 과연 승리만이 미덕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다. 만약 승리가 미덕이라면 패배는 또 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에선 종종 승리보다 더 값진 패배가 있을 수 있다. 경기에서 져도 스포츠가 재미있는 이유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가 16일 귀국했다. 일본 진출 3년째인 올해 이승엽 선수는 시즌 중반까지 홈런 경쟁에서 내내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시즌 막판 무릎부상으로 출장 기회가 줄어들면서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왕을 내주고 말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도쿄에 머물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거의 다잡은 홈런왕을 놓친 것이 오히려 약이 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홈런왕에 실패했기 때문에 내년에도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고 더 분발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 진단한 것이다. 진정 지고도 이긴 '승리보다 값진 패배'가 아닐까. 되새겨 볼 만한 대목이다.
김인식 감독의 패배든 이승엽 선수의 실패든 둘 다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실패를 디딤돌로 삼는다면 '승리 이상의 패배'를 가져오는 경우도 적잖다.
'승리를 뽐내지 말며 패배에 성내지 않기'. 미국 최고의 교육자 상인 '디즈니상' 수상자인 론 클라크가 이야기하는 '아이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 55가지 원칙' 중 하나다. 하지만 경기에 지고나서 좌절하고 안달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한국축구대표팀이 15일 테헤란에서 열린 2007 아시안컵 B조 최종예선 이란과의 원정 경기에서 0대2로 완패한 후의 모습 또한 그랬다. 패배 이후 그라운드에 엎드려 있는 선수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측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당당한 패배자의 모습이 더 그리운 게 아닐까. 최선을 다했다면 패했을 때 변명 없이 받아들이는 아량이 필요한 법이다.
때마침 11월 들어 각 스포츠 종목에서 한국 팀의 패배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어디에서고 패자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게 더 문제다. 패자는 외면당한다. 승자는 단 1명, 단 1팀이지만 승자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패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패자를 바로 외면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이미 패배한 사회 아닐까.
패배자에겐 이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다. 미국의 선거제도를 보자. 미국에서의 선거는 패배한 후보자가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해야 끝이 나는 독특한 구조다.
이달 초 미국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선거 결과에 세계가 집중한 적이 있었다. 모든 선거의 개표가 완료된 상태서 의석수는 공화당이 49석, 민주당이 친민주 성향 무소속 2명을 포함해 50석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버지니아주 상원선거에선 민주당의 제임스 웹 후보가 117만2천671표(49.6%), 공화당의 조지 앨런 의원이 116만5천440표(49.3%)를 얻어 표 차이가 7천231표에 불과했다. 버지니아주 선거법은 득표차가 1%포인트 미만이면 재검표를 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공화당측에서 재검표를 요구하면 최종결과 발표는 최소 수주일이 지나야 가능할 판이었다. 그러나 앨런 의원은 깨끗하게 결과에 승복했다.
'스포츠맨십(sportsmanship)'에 상대되는 말로 '게임스맨십(gamesmanship)'이라는 용어가 있다. 게임스맨십은 속임수를 써서 이기려고만 하는 비신사적인 행동이다. 최근 스포츠든, 정치든 게임스맨십을 추종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젠 차라리 당당하게 지는 법을 좇는 건 어떨까. 승리보다 더 값진 패배를 위해서 말이다.
박운석 스포츠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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