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유홍준 作 의자 위에 흰 눈

간밤에

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

가장 멀고 먼 우주에서 내려와 피곤한 눈 같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

창문에 매달려 한나절,

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에 흰 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 한다고

햇살이 퍼지자

멀고 먼 곳에서 온 흰 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 가는 것

붙잡을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 밖으로 간밤에 내린 눈을 바라본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점차 그 '눈'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면 '눈'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마당에 내놓고 간혹 앉아 쉬던 의자 위에 '흰눈이 소복이 내려' 사람이 쉬듯이 쌓여 있다. 지상에 오기까지 '멀고 먼 우주에서 내려'오지 않았던가.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이다. 웬만하면 이 지상에서 안식을 찾으련만 햇살이 퍼지자 '아직도 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떠나간다. 햇살 속을 떠나가는 그 '눈'을 붙잡을 수 없다. 그렇게 떠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이 '눈'처럼 지상에서 잠시 쉬었다가, 어느 날 자취 없이 떠나야 하리.

구석본(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