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 구두 두 켤레

차가운 바람이 사람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바쁜 마음을 재촉하는 세밑의 어느 날 오후, 시내에서 멀리 벗어나 앞산 비탈 그늘 속에 납작 엎드려 있는 소녀 가장 초롱이네 사글세방에 낮도깨비처럼 산타클로스가 나타났습니다. 늘 서울에만 머물던 이 지역의 황금만 국회의원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의원님의 자가용은 신문사와 방송국 아저씨들의 차까지 줄줄이 달고 왔습니다. 아파트 공사장 5층 난간에서 떨어져 3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 지내는 아버지를 보살피며, 2년 전 돈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초롱이네 집 주변은, 마치 천 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난 동물원처럼 갑자기 야단법석이었습니다.

방송국 아저씨들의 카메라는 흡사 위내시경 사진을 찍듯이 어둑어둑한 방안부터 차례로 비추어나갔습니다. 너덜너덜한 벽지에는 쥐 오줌과 빗물 자국이 기어 다니고, 축 처진 빨랫줄에 걸린 양말짝과 수건, 무릎이 나온 내복…, 꾀죄죄한 이부자리 속에서 얼굴만 내민 초롱이 아버지의 누우런 얼굴, 그 퀭한 눈빛과 깎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이 차례로 클로즈업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문 앞 연탄아궁이 옆에 놓여있는 뚜껑이 우그러진 냄비 몇 개와 수저통, 라면봉지….

모두가 지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카메라에 풀죽은 모습을 드러내는데 유독 방문 앞 시멘트 벽돌 위에 나란히 놓인 구두 두 켤레가 낯선 식구인 양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신문기자 아저씨가 웬 구두냐고 묻자 초롱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빠 엄마가 신던 구두라고 했습니다. 아빠가 하루 빨리 일어나 그 구두를 신고 다시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날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돌아올 엄마가 그 구두를 신고 친구 엄마들처럼 학교의 학부모 모임에도 참석할 날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꼭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기에 매일 매일 그 구두를 닦아 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사간 바쁜 일정에 쫓긴 황금만 의원님은 초롱이의 구두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실고 온 라면 세 상자와 쌀 한 포대를 가운데 두고 초롱이와 함께 황급히 사진을 찍은 후 서둘러 떠나갔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원님의 행차를 구경한 산동네 주민들과 그날 저녁 신문과 방송의 황금만 의원 동정 난에 자세히 소개된 초롱이의 구두 이야기를 보고 들은 시민들은, 불우한 이웃은 초롱이가 아니라 어디가나 사진 찍기에만 급급한 황금만 의원이라고 쑥덕거렸습니다. '황금만 의원은 초롱이가 매일 닦아 두는 그 구두에서 눈물로 빚어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 희망을 라면 상자로 열 상자 쯤 되레 얻어가야 했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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