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 이민영 탤런트 부부의 이혼문제가 불거지면서 가정폭력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전에도 연예인 부부들의 가정폭력과 이혼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언론은 '누가 누구를 때렸고, 전치 몇 주의 상처를 입었으며, 그 이유는 뭐라더라'는 식의 보도를 쏟아낸다. 하지만 이것은 가정폭력의 단면일 뿐이다. 정작 말 한마디 못하고 숨죽여 흐느끼는 사람에 대한 보도는 쏙 빠져있다. 바로 아이들이다. 상처를 입는 줄도 모른 채 고스란히 아픔을 지켜보고 받아내야하는 아이들. 가정폭력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신음하고 있다. 겉으로 웃어보일 지 모르지만 결코 없어지지 않을 마음의 흉터를 안은 채 이들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아저씨!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게 뭔지 아세요? 그건 이 넓은 세상에 나만 혼자 내동댕이쳐졌다는, 그래서 나 밖에 없다는 한없는 외로움이랍니다. 저는 올해 2학년이 되는 여고생 정현옥(가명)입니다. 아래로 여동생이 한 명 있구요. 지금 중학교에 다니죠. 아빠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돈을 아주 많이 버세요. 우리 엄마 이야기가 빠졌죠? 엄마는 작년 봄에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불쌍한 우리 엄마는 나만 남겨두고 혼자서 가버렸어요. 엄마가 죽던 날, 경찰들이 왔어요. 자살이라고 하더군요. 엄마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너희들만 남겨두고 이렇게 떠나서 미안하다. 하지만 도저히 아빠의 매질을 참을 수 없었어. 정말 미안하다. 동생을 부탁해'라고 쓰셨어요.
우리집, 참 화목했어요. 저랑 동생도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답니다. 생일이면 가족끼리 모여서 파티도 열고, 부모님은 제가 받고픈 선물도 미리 알아서 챙겨주곤 하셨죠. 아빠는 조금 무뚝뚝하기는 해도 제 말이라면 다 들어주셨고, 엄마도 "너희들 때문에 내가 산다."며 항상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던 분이셨어요. 그 때가 제 기억에 가장 좋았어요.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이 다투는 일이 잦아졌어요. 아마 제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부터였던 것 같아요. 무슨 이유였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돈 문제 때문에 아빠가 엄마에게 따지며 화를 냈던 기억은 나요. 하루가 머다하고 다툼이 있었고, 두 분이 싸울 때면 저는 혼자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답니다. 평소엔 저에게 화도 잘 내지 않던 아빠가 싸움을 할 때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너무나 무서운 표정으로 엄마에게 고함을 지르며 욕을 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엄마가 없었어요. 수면제를 드시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너무 겁이 나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어요.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는 전혀 딴 사람이 돼 버렸습니다. 제가 말을 걸어도 대꾸도 없이 하염없이 천장만 쳐다보곤 했습니다.
정작 무서운 일은 그 다음부터였어요. 다툼은 있어도 그저 말로만 끝났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엄마에게 손찌검을 시작했습니다. 한달에 한두번이던 손찌검은 점점 잦아졌어요. 제가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일주일에 한두번씩 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말썽을 피운 것도 아닌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처음에는 아빠에게 매달려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불쌍한 엄마 때리지 말라고 애원하고 빌어도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답니다. 행여 엄마가 죽으면 어쩌나싶어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어요. 무서워 우는 동생을 안고 방 한 구석에서 같이 울 수 밖에 없었죠.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요. 그 지긋지긋한 시간들이 끝났답니다. 엄마가 죽어버렸으니까요. 아빠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빠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이 더 미웠습니다.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밥을 먹고, 학교를 다녀야한다는 사실이 죽을만큼 싫었습니다. 불면증이 왔어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수면제를 먹어야 그나마 잠시라도 잠이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과연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엄마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고 싶었습니다. 수면제에 취해 정신도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손목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빨간 피가 솟구치는 걸 보고 덜컥 겁이 났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죠. 살려달라고. 아저씨! 저 참 바보같죠? 그래요. 이런 제 자신이 한없이 밉답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아빠도 밉고, 우리만 남겨놓은 엄마도 이젠 미워집니다.
뒤늦게 제 문제를 알아차린 아빠가 정신과 상담을 받도록 했습니다. 우울증 진단이 나오더군요. 상담도 받고, 약도 먹고 있습니다. 아빠에 대한 미움도 조금 가시고, 또 왜 그렇게 다투었는지도 약간은 이해하게 됐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볼 작으나마 여유를 갖게 되면서 또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동생입니다. 지금은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학교 가고, 돌아와서 학원 가고, 식사도 꼬박꼬박 합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불안함이 보입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그저 씨익 웃어보이고 맙니다.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고, 아빠도 화를 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저랑 동생은 여전히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커서도 결혼 같은 건 절대 안할 겁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언제 우울증이 재발할 지 모른다고 하네요.
앞서 정현옥양의 이야기는 대구지역 한 가정폭력상담소에서 접수한 사연이다. 10여차례 이상 현옥양을 상담한 담당자는 "단순히 우울증 문제가 아니라 아빠에 대한 미움, 엄마에 대한 연민이 너무 지나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지 의문스럽다."며 "당장 증세를 완화시키는 의미의 치료는 가능하겠지만 언제 어떤 형태로 감정이 폭발할 지 모르기 때문에 평생 상담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동생 문제도 심각한 상태라고 말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급작스런 변화를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보이지 않는 내면의 충격이나 공포는 현옥이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는 것.
담당자는 "정작 무서운 것은 드러내놓고 힘들다고 말하는 아이보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감내하는 아이"라며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숨은 곳에서 계속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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