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저자와의 대화)시집 '물방울 무덤' 엄원태 시인

얼마 전 만난 시인은 혼이 빠져 보였다.

안 그래도 과묵한 그의 입술이 바짝 말라 보였고, 눈빛도 퀭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새로 나올 시집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산통이었을까?

엄원태(52) 시인이 12년 만에 시집 '물방울 무덤'(창비 펴냄)을 내놓았다.

'.../저 굴뚝들 때문에 아주 어깨가 삐딱해지거나, 힘을 다해 용쓰느라 핏줄들까지 툭, 툭, 불거져나온 게다./...'('굴뚝들') 그가 보여준 팔은 온통 꽈리모양의 불거져 나온 핏줄로 울퉁불퉁했다. 이틀에 한번 꼴로 5시간씩 신장투석을 받은 상처들이다. 제목처럼 '물방울 무덤' 같다.

그는 "그 5시간이 구도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투석 뒤에 따르는 경련과 웅크림, 그리고 식은 땀. 그것은 결코 쉬운 예배시간이 아니다. 그 고통을 "존재의 한계를 일깨우는 스승"이라 했다.

시집에는 이러한 그의 상처와 고통, 점멸과 생명의 갈구로 가득하다. '내 아파서 너를 아프게 하는 게 더 아프구나!'('불탄 나무'), '치악산 첩첩 흑백으로 드러나는 늑골들/.../길은 어디서나 아득해서, 죽음 지척이다'(길에 대한 회상'), '수액이 목메도록 차오른 둥치, 부러진 부위에서 맑은 수액을 게워내어 제 몸통을 적신다.'('고로쇠나무의 마지막 봄날')... .

"고통을 정화하고, 한계를 느끼면서 사물에 대해 긍정하게 됐다."며 "사람이 자연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번 시집의 인물시편을 두고 한 말이다. 휴먼 TV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실존 인물 20여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16편의 시에 담아냈다.

김밥을 팔면서 하루 5천 번 절을 하는 전도섭씨, 뇌종양에 걸린 세네갈인 압둘라,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 조로에 걸려 할아버지 얼굴을 한 열 살 난 메간, 다운증후군 배우 강민휘... .

신장투석을 받으면서도 즐겨본 '인간극장'의 풍경. 그는 거기서도 '삶에 대한 긍정법'을 배웠고, 시인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그들을 껴안고 있다.

그는 90년대 초 시집 '침엽수림'에서와 '소읍에 대한 보고'를 내고 10여 년간 침묵했다. 그 중 7~8년은 시와 결별하고 일에 몰두했다. 가족들에게 결핍을 주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물을 떠난 갯우렁은 2003년부터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내 몸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갯우렁')

1987년부터 앓은 만성신부전증은 올해로 20년째가 된다. "이제 아예 같이 산다."고 했다. "'존재'라는 구체성과 한계를 동시에 껴안는다는 의미에서, 그 '쓸쓸한 긍정'만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라는 그의 말대로 이제 고통은 그의 몸으로 육화됐다. 그것은 그의 시(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36쪽. 6천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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