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수용의 현장리포트] 사표, 이럴때 쓰고 싶다

직장인들은 누구나 당당한 모습으로 사표를 내미는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 이유는 수만 가지다. 아니 구체적으로 나열하자면 수십만 가지는 넘을 성 싶다. 중요한 것은 '당당함'이다. 쫓겨나는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나가는 것이다. 매사에 지시하는대로 묵묵히 따라야 하는 것이 직장인들의 숙명.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바로 당당하게 사표를 들이미는 순간이다. 짜릿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더럽고 아니꼽고 배알이 뒤틀리지만 참는다. 사표를 쓰고픈 이유는 수십만 가지일 지 모르지만 쓸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먹고 살아야 하니까. 오늘도 사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직장인들, 당신만 사표를 품고 있는게 아님을 잊지마시라.

◇ 자신의 영달만 좇는 상사를 볼때

공기업에 다니는 최모(35) 씨는 회사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얼마 전 집에서 쉬고 있던 토요일, 회사에서 갑작스레 전화가 걸려왔다. 초과근무수당 지급 문제가 감사에 적발돼 월요일까지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 급한 일이라는 말에 가족들과의 약속도 미뤄둔 채 회사로 달려간 그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초과근무수당 지급내역이라는 서류에 무조건 서명을 하라는 것. "이렇게 여러 번 초과근무를 한 적도 없고, 수당을 받지도 못했다."고 항의했지만 상사는 막무가내였다. 월요일까지 지급내역과 서류를 맞춰놓지 않으면 자칫 징계가 내려올 수도 있다는 것.

협박인 지 애원인 지 분간할 수 없지만 상사는 "다른 직원들도 다 했는데 왜 버티냐?"며 서명을 강요했고, 마뜩치 않았지만 최씨도 서명을 했다. 뒤늦게 알아본 결과, 초과근무수당이라며 돈이 내려왔는데 어디에 썼는 지는 알 수도 없고 그저 지급된 것으로 끼워맞췄다는 것이다. 최씨는 이런 지경까지 몰고 온 사장도 밉지만 싫은 내색조차 못하고 그저 무마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중간 간부들이 더 미웠다. 그저 제 몸 하나 추스리기에 바빠서 조직도 후배도 없는 상사들, 정말 사표 내고 싶다.

◇ 상사의 비위를 맞춰야할때

직장생활 5년차인 정모(32) 씨는 회식할 때면 평균 귀가시간이 새벽 2시를 넘어선다. 일주일에 평균 한두번 씩은 꼭 겪는 일이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다. 원래부터 술을 못하는 정 씨는 회식자리에서도 늘 음료수를 마신다. 그렇지만 회식자리를 일찍 박차고 나올 수도 없다. 팀장 때문이다. "술도 못마시는데 다른 직원들 뒤치다꺼리라도 해라."고 엄명(?)을 내렸다.

다른 직원이라고 해봐야 팀장 뿐이다. 술자리가 모두 끝나면 팀장 차를 끌고 졸지에 대리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한다. 정 씨는 달서구 대곡동, 팀장은 북구 서변동에 산다. 귀가 길 택시비도 만만치 않다. 수고했다거나 택시비 쓰라며 돈을 준 적도 없다. 한 번은 회식자리에서 일찍 빠져나왔다가 봉변을 당했다. 휴대폰으로 두고보자며 욕설을 퍼부었다. 휴대폰을 끄고 일찍 귀가한 적도 있었다. 이튿날 아침 회의때 "팀원들은 24시간 연락이 돼야 하는데 요즘 기강이 해이해져서 연락 두절되는 사람이 있다."며 공개 면박을 주었다. 인사이동 때면 타부서를 희망했지만 팀장이 항상 걸림돌이었다. "우리 부서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며 붙들어 두기 때문. 정 씨는 진지하게 사표 제출을 고민 중이다.

◇ 면박받을때

입사 3년차인 강모(27'여) 씨는 얼마 전 바뀐 팀장만 생각하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회사 특성상 여성이 많은 곳. 팀장을 포함해 5명 중 4명이 여성이다. 강 씨는 첫 대면부터 팀장과 삐걱거렸다. 다음 주 프로젝트 발표 관련 보고서를 제출했더니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일해왔어요?"라며 대뜸 면박을 주었던 것.

처음부터 다시 해오라는 말에 "어느 부분이 잘못됐다는 말씀입니까? 지금 시간이 촉박해서 처음부터 하기는 무리인데요."라고 답했다. 순간 팀장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알았어요. 가서 일 보세요."라고 끝냈다. 다행스럽다싶은 생각 한 구석에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점심시간 따돌림부터 시작됐다. 함께 식사하러 나갈 즈음, 팀장은 "강○○ 씨, 거래처에 연락해서 다음 주 보고회 내용 꼼꼼하게 체크하세요."라고 말한 뒤 다른 팀원들과 일제히 나가버렸다. 다른 사무실에 갔다가 점심시간에 5분 만 늦게 와도 모두 자리를 비웠다.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면박을 주는 것은 기본. 회식자리에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동료들도 팀장 눈치 보느라 말을 못 건다. 사표를 쓰고 싶지만 갈 곳도 없다.

◇ 아! 정말 쓰고싶다

공무원들 때문에 죽을 맛이다. 처음에 이렇게 하라고 했다가 관계부처 장관이나 국장이 바뀌자 금세 방향이 바뀐다. 프로젝트 책임자는 엄연히 박사급 연구원인데 아무 말도 못한다. 공무원이 전화 한 통을 걸면 그것으로 끝이다. 원래 방향대로 하자고 대들어봐야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와중에 고위 공무원과 연줄을 닿아서 큰소리치는 중간 간부들, 정말 꼴보기 싫다. 학연, 지연으로 계파를 만들어놓고 '자기 라인'이 아니면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심지어 이간질까지 한다. - 국책연구원 2년차 김모(30) 씨.

방송 녹화 하루 전에 갑자기 출연진과 대본을 바꾸란다. 대본을 다 써놓고 클로징 멘트만 남겨놓은 상황에서. 대본은 다시 쓴다고 쳐도 하루 만에 출연할 게스트를 구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위에서 하라니까 어쩔 수 없다. 열심히 전화 돌리다가 부장에게 할 말이 있어서 갔더니 컴퓨터로 화투를 치고 있었다. 노트북 컴퓨터 집어던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가까스로 완성한 대본을 제멋대로 고치는 것을 보고도 한번 더 참았다. 하지만 녹화 한 시간 전, 원래대로 다시 바꾸라고 말한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제가 쓴 게 낫죠?"라고 물었더니 "네가 어떻게 썼는데?"라고 되묻는다. 참을 '인'(忍)자를 마음에 다시 새긴다. - 방송국 구성작가 이모(32) 씨.

동창회에 갔다가 회사 이야기가 나왔다. 동기들 대부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체에 다닌다. 중소업체에 다니기 때문에 회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떤 곳인지 설명해야 한다. 실컷 설명했더니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그런 회사도 있구나. 어쩌다가 거기에 들어갔냐?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잖아."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 연봉 이야기가 나오면 기가 죽는다. 열심히 회사 생활 잘하고 있다가도 동창회 한 번 갔다오면 속이 상한다. 연봉 그만큼 받으면서 술 한 잔 사겠다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 - 직장인 안모(29) 씨.

◇ 이럴 때 사표 쓰고 싶다- 베스트 10

1. 반말이나 욕 등 인격적 무시, 모욕을 당했을 때- 1천256명

2. 상사라는 이유로 놀면서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만 할 때 - 1천85명

3. 월급이 너무 적을 때 (열심히 일해 월급 받아도 집에서 용돈 받아쓰는 친구만큼도 못벌 때) - 425명

4. 미래가 불투명할 때 - 374명

5. 아침에 힘들게 일어날 때마다 - 342명

6. 너무 일이 많아 밤새고 다음날 또 철야해야 할 때 - 285명

7. "그것 밖에 못해?"라며 내 능력을 무시할 때 - 265명

8. 내 의견을 말도 못하고 상사가 하라는 대로만 해야 하는 강압적 분위기 - 250명

9. 내가 완성한 결과물을 중간에서 가로챌 때 - 234명

10. 상사가 이유없이 날 미워한다는 느낌이 들 때 - 225명

* SBS 토크쇼 '야심만만'이 직장, 아르바이트 경험자 남녀 7천18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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