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송강호는 아내와 가족이 외국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비디오를 보면서 라면을 먹다가 그릇을 내동댕이친다.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매달 적지않은 돈을 송금하지만 자신은 영락없이 돈버는 기계로만 전락한 '기러기아빠'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주겠다는 생각 하나로 가족 모두를 외국으로 유학보내는 아빠가 늘어나고 있다. 2007년 현재 전국의 기러기아빠는 20여만 명으로 추정될 정도로 우리 주변에서 기러기아빠는 흔해졌다. 그러나 기러기아빠는 화려하지 않다. 외롭고 힘들다. 기러기아빠들의 애환 속으로 들어가봤다.
◆"건강 챙기기 제일 힘들어"
김순영(45·자영업·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씨는 가족들이 돌아오는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기러기아빠가 된 지 8개월째다. 김 씨가 힘들어진 건 외로움뿐이 아니다. 벌써 허리디스크와 당뇨가 왔다. 제때 밥을 챙겨먹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야 하는데 건강을 챙길 수가 없었다. 김 씨는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스스로 감당할 자신이 없고 가족의 손길이 필요하다."면서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아프다는 얘기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바쁘게 사는 게 최고"
강영우(44·대구시 중구 계산동) 씨는 3년차 기러기아빠다. "3개월째부터 우울증이 찾아왔다."는 그는 "그 이후 거의 1년 동안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두려웠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처음에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결국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며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른 활동에 바쁘게 사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다 신문을 통해 기러기아빠의 잘못된 소식이 들려오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혼자 지내는 주말 힘들어"
김성권(44·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씨는 2년이 지나면서 기러기아빠 생활이 익숙해질 만한데도 식사문제로 여전히 고생하고 있다. 아침은 아예 거르고 식사시간이 불규칙한데다 폭식하다 보니 체중이 5kg이나 늘었다. 주말에는 유난히 외로운 것도 기러기아빠들의 특징. 주중엔 일 때문에 정신없이 지내지만 주말엔 혼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가족모임이 있을 때 혼자 가는 것이 서글프다."고 말했다.
◆"관계회복 필요성 절감"
최용식(45·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씨는 지난 연말 가족들이 귀국하면서 3년간의 기러기생활을 청산했다. 하지만 아직도 아내와 아이들과의 관계가 서먹하다.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떨어져있었던 시간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가장으로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린다는 사실도 가끔 느낀다. 아이들은 3년간 자신들과 살아온 엄마를 더 존경한다. 아이들이 "엄마를 가장 존경한다."고 할 때는 가족들에게 돈버는 기계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외로움 "이렇게 이겨냈어요"
▶인터넷에 가족카페 만들어
박상효(44) 렉서스 대구전시장 영업팀장은 혼자 생활하는 것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젊을 때 10년정도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집안 일은 손수 해결하는데 익숙하다. 외롭다는 느낌도 덜하다. 매일 인터넷 화상전화로 1시간 이상 아이들과 대화하기 때문. 또 이메일을 통해 부인에게 연애편지도 보내고 인터넷에 가족카페도 만들었다. 가정에 쏟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장점. 박 씨는 "기러기 아빠 생활에 적응됐는데 주위에서 외롭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선이 더 부담된다."고 말했다.
▶자기계발의 기회로 삼아
서찬교(45) 씨는 기러기아빠 생활을 청산한 지 3개월이 지났다. "가족이 떨어져 있어서 해체될 것 같으면 함께 있어도 해체된다."고 말하는 서 씨는 혼자 지내는 동안 가족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급적 하지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겪었던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해소시켜줬다는 만족감도 있다. 아이들도 경제적으로 변했고 부부사랑은 더 깊어졌다. 3년간 떨어져 있다가 함께 생활하면서 오히려 신혼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서 씨는 "가족과 떨어져 있을 때 기러기 아빠들은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면서 "평상시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면 시간도 빨리 가고 외로움도 덜 느낀다."고 말했다.
※왜 '기러기 아빠'인가?
기러기는 일평생을 일부일처로 살면서 부부애가 좋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우리 전통혼례식에서 기러기 한 쌍이 예패로 쓰인다. 기러기는 암수 중 한 놈이 먼저 죽으면 짝잃은 놈은 상대를 그리워하면서 혼자 산다. 항상 함께 있어야 행복한데 한쪽이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을 외국에 보내고 혼자서 그리워하면서 희생하는 모습이 기러기의 습성과 비슷해서 '기러기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글·서명수기자 dideroit@msnet.co.kr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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