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백은(白隱)이 사는 이웃 마을의 처녀가 애를 낳았다. 딸이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배자 아버지가 닦달을 했다. "어느 놈팽이의 자식이냐?" 처녀는 급한 김에 "백은 선사님의 아이예요."라고 변명해버렸다.
화가 치민 아버지는 백은 선사에게 달려가 삿대질을 해댔다. "에잇 더러운 땡X! 출가 수행자란 사람이 처녀에게 애를 만들어?" 그러나 그같은 악담에도 백은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그래요?"라고만 말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나자 성미가 급한 처녀의 아버지는 씩씩거리며 아기를 백은에게 데려왔다. "이놈이 당신 자식이오!" 그러자 백은은 또 "그래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아기를 건네받았다. 선사는 아기를 안고 산모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젖을 구걸해 먹였다.
동네에 소문이 쫙 퍼졌지만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낀 처녀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백은 선사님은 부처님 같은 분입니다.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엄청 부끄러움을 느낀 부모가 백은 선사에게 찾아와 백배사죄를 했다. 그러나 백은은 아기를 넘겨주며 단지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그래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비구가 되었다. 부귀영화와 쾌락 속에서도 편치 않았던 마음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거지가 되었을 때 크나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날 붓다는 문득 궁궐에 두고 온 처와 부왕이 생각났다.
고향으로 찾아가 친지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허름한 거지 차림의 탁발승으로 찾아온 아들을 보며 왕은 성을 내며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태자의 옷이 거지 차림이라니! 이런 식으로 와야만 되는가?" 격노하여 쏘아붙였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아무런 변명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다만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붓다의 눈에는 연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눈싸움에서 아버지는 지고 말았다. 그는 아들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렸다.
성인은 지극히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며 어떤 주장도 않았다. 그는 바깥일에 연연하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본성의 기쁨과 사랑 지혜를 깊이 키워간다. 필자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래요?"하고 그윽하게 바라보며 살아야지 하고 결심도 해봤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더라.
이인수(대구교대 교수)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