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언장 쓰는 사람들

1. 건강할 때 쓰는 유언장은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사진은 한 임종체험현장의 입구 2. 일부 보험회사들은 종신보험 청약 때
1. 건강할 때 쓰는 유언장은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사진은 한 임종체험현장의 입구 2. 일부 보험회사들은 종신보험 청약 때 '가족에게 남기는 글'을 유언처럼 쓰게 한다.

'가족에게 남기는 글을 직접 써보자.' 단단히 마음을 먹고 백지를 받아들었지만 무슨 말을 남겨야 할 지 막막하다. 불혹을 지난 나이지만 막상 죽음을 생각하고 나 없는 세상에 남겨질 가족들을 생각하니 끔찍할 수밖에. 마음이 숙연해지고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한 마디씩은 꼭 남기고 싶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우린 참 잘 맞는 친구였고 그래선가 의기투합하면서 잘 살아왔지. 그러나 이 글이 당신에게 전해진다면 하는 생각을 하니…. 후회스러운 일들이 먼저 떠오른다.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고 무엇보다 두 아이는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이었어. 다시 태어나더라도 꼭 당신을 만날거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 널 얻고나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아빠가 됐다. 참 예쁘게도 잘 자라줬고…. 그림을 참 잘 그리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였지. 가정통신문을 두고와서 야단치자 너는 학교에 그걸 가지러 갔다가 버스를 잘 못 탔었지. 아빠는 그 때 널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넌 울지 않았었지…. 앞으로도 그런 씩씩한 삶을 살아주렴.

'로보트왕자' 아들. '로보트도 가끔은 감정이 있다.'고 말해 깜짝 놀라게 한 아들. 너무 착해서 걱정이었는데 이젠 너도 의젓한 사내가 되어있더구나. 남을 따라 다니지 말고 앞서가는 삶을 살 길 바란다. 뒤에 서면 편할지도 모르지만 맨앞에 서면 더 새롭고 흥미진진한 삶을 맛볼 수 있단다. 하늘에서도 늘 당신들을 지켜줄테니 열심히 살길 바란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사과나무를 심는 것처럼 묵묵히 할 일을 다해야 한다는 경구를 남겼다. 그러나 지구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라도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 갑자기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난 무엇을 할 것인가?

얼마 전 30대의 한 재미교포가 마치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가족들에게 생전에 제작해 남겨 둔 비디오가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됐다. 국제빈민아동 구호기구인 '월드비전'에서 활동하던 조너선 심 씨는 9·11 테러 8개월 후인 2002년 5월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것.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 그래서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라며 비디오를 찍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2005년 7월, 33세의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요절했다.

건강한 일반인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여전히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래서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해놓은 사람은 거의 없다. 건강이 나빠져서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다고 느껴질 때, 혹은 남겨둘 재산이 많을 경우 사람들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유언장'을 작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법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유언장에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 같은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재산분할 등을 자세하게 남겨놓기도 벅차기 때문 아닐까.

수년 전부터 종신보험이 인기를 끌면서 일부 보험회사에서 보험계약과 동시에 유언장 혹은 '가족에게 남기는 편지'를 받고 있다. 이 유언장은 보험계약자가 사망한 후에 가족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유언장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상길(39) 씨는 "보험에 들 당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면서 "이 글이 죽어서 전달된다고 생각되자 살아 있을 때 가족들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여덟 살짜리 딸과 갓 돌이 지난 아들 등 두 자녀를 뒀던 그는 "다시 한 번 살아온 인생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뜻깊은 계기가 됐다."면서 "가끔씩 힘들 때마다 그 편지를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40세 주부는 보험청약 후 "딸은 평소 착하니까 앞으로도 착하게 인생을 살고 아들은 자신있는 모습으로 인생을 즐기며 살아라. 그리고 아빠(남편)는 술을 좀 줄이고 아이들에게 더 자상한 아빠가 되어달라."고 썼다.

실제로 이런 유언장이 전달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종신보험에 가입했던 한 고객은 보험가입 직후 암으로 사망했고 그의 유언은 보험금과 함께 가족들에게 전해졌다. ING생명의 박성민 FC는 "보험청약서를 작성하고 나서 뒷면에 가족에게 남기는 편지를 써달라고 하면 화를 벌컥 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얼떨떨해하면서도 받아들인다."면서 "'이 편지가 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전해진다면 행복하게 살아라….'는 내용을 적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대가야축제 행사를 연 고령군은 아예 '죽음체험관'을 운영했다. 2년째 축제기간에만 운영하고 있지만 반응이 좋아 테마박물관이 완공되는 2009년 이후에는 상설화하기로 했다. 수의와 관까지 마련해놓은 이곳에서는 체험자들에게 먼저 유언장을 쓰게 한다. 그리고는 수의를 입히고 관속에 들어가게 해서 관뚜껑을 5분간 닫는다.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과 죽음이 두려워, 10초도 안 돼서 뚜껑을 두드리면서 열어달라는 사람도 있다.

이곳에서 임종체험을 했다는 김연진(28·여·대구관광센터 통역안내원) 씨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성찰해 볼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유언장에는 진지하게 유언을 쓰진 않았지만 '종신보험에 가입했는데 엄마 아빠가 타게 해뒀다. 불효자식이 이걸로라도 보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간략하게 썼다."고 덧붙였다.

굳이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는 것은 어제를 되돌아보고 오늘의 삶을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채찍이 될 수가 있을 듯하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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