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사 해장스님께
산일 안부를 물었더니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 있다, 하십니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책 한 권이 왔습니다. '아득한 성자'. 온통 흰 눈에 덮인 가운데 동자승인 듯한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습니다. 몽당붓으로 그냥 시부저기 그린 듯 만 듯한 그림 한 쪽(그건 지은이의 진솔 그림이었습니다). 그게 답니다. 그런데 그 표지에 붙들려 한동안 속을 열지 못했습니다. 一默如雷(일묵여뢰). 무슨 말을 더 하랴 싶어서요.
필명은 曺五鉉(조오현), 법명은 霧山(무산), 법호는 萬嶽(만악). 게다가 자호로 쓰는 雪嶽(설악)의 산감을 자처하시니, 그 산의 무게를 다 어쩌시려고요. 책을 덮으려다 말고 또 한 번 놀랍니다. '책 끝에'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이 몸은 놋쇠를 먹고 火湯(화탕) 속에 있도다'.
백담계곡 깊은 곳에 시조의 호리를 걸어 놓고 씻고 또 씻는 이. 吹毛劍(취모검) 날 끝에서 까무러치더라도 짓물러 빠진 손톱 발톱 눈썹을 닦고 또 닦는 이. 전자가 시인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선승의 면목입니다.
철은 이미 한참을 지났지만, 새삼스레 산수유꽃 환한 행간을 바장입니다. '산일 안부를 물었더니', '어제는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 있다'는 대답. 그래서 제목도 '들오리와 그림자'입니다. 그게 답니다. 그런데 그 문답에 붙들려 한동안 정신을 놓았습니다. 無爲而化(무위이화). 더 무슨 말을 하랴 싶어서요.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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