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과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팝니다. 파는 사람의 양심과 사는 고객의 양심이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대구시 수성구 고모동 팔현마을. 고모령을 지나가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정겨운 2차로 도로변에 여환욱(55) 씨의 과일가게가 있다. 인터불고 호텔에서 시지 방향으로 300여m를 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 있다.
가게라고는 하지만 비닐하우스로 지어진 작은 규모. 그런데 이 가게에는 과일이 담겨 있는 소쿠리들과 나무로 만든 '돈통' 밖에 없다. 주인은 없다. '현금은 돈통으로 넣어주세요.'라는 문구와 주인의 전화번호를 적은 안내판만 놓여 있다. 원하는 과일을 골라 가져가고 돈은 양심껏 통에 넣으면 그만이다. 혹시라도 CCTV가 설치돼 있지나 않을까 주위를 살피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없다.
이 가게에서 파는 것은 과일뿐이다. 그러나 바구니에 담긴 것은 복숭아와 자두 등 과일만이 아니다. 맛있는 양심도 듬뿍 담겨 있다.
"이 힘겹고 어두운 세상에도 양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에 마음 뿌듯합니다."
주인이 지키고 있지 않으면 돈을 내지 않고 그냥 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아니 '양심불량'을 확인하는 순간, 과일가게는 문을 닫아야할지도 모른다. 여 씨는 "이렇게 하는 것은 굉장히 쉬우면서도 정말 어렵습니다."고 말한다. 그가 무인과일가게를 운영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양심회복을 위한 캠페인차원이 아니다. 농사일에 바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는 8년 전부터 이곳에서 직접 과일을 팔았다. 그때는 모친이 가게에 나와서 지켰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일손이 없어서 과일가게를 운영할 수 없자 여 씨는 사람들의 양심을 믿고 무인가게를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벌써 4년째다.
"무인가게를 하면서부터 우린 더 행복해졌어요. 기자들이 간혹 돈을 안 내고 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묻지만 100%가 아니라 101%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돈이 1천 원 모자란다고 전화가 와서 그냥 가져가시라고 했더니 다음에 오셔서 그때 못낸 1천 원이라며 더 내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한 방송사에서 실제로 하루 종일 이곳에 무인카메라를 설치, 지켜본 적이 있었다. 양심불량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긴 전남 장성의 한 시골마을에서 운영하던 무인공판장은 한때 '양심가게'로 소문났다가 10여 차례 도둑이 든 끝에 CCTV까지 설치했다가 철거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양심을 팔기도 어렵고 양심을 지키기도 어려운 것이 요즘 세상이다.
'양심' 만으로 여 씨의 과일가게가 각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 과일가게에서는 매일 팔리는 양만큼만 수확해서 내놓는다. 가게 바로 뒤쪽은 여 씨의 집과 과수원이다. 2만여㎡의 과수원에는 복숭아와 자두, 버찌, 포도, 감 등 20여 종의 과실수가 있다. 야트막한 산비탈을 일군 과수원이라 배수가 좋은 탓에 여 씨의 과일은 당도가 높고 맛있다. 5월부터 10월까지 품목을 바꿔가면서 제철과일을 살 수 있는 것도 양심가게가 사랑받는 이유 중의 하나다. 5월 체리(버찌)를 시작으로 6, 7월에는 복숭아와 자두, 8월에는 포도, 9월 자두, 10월 단감과 대봉을 팔고 일년 내내 직접 양봉한 꿀도 내놓는다.
맛있는 제철과일을 연중 싼 값으로 살 수 있는데다 주인과 스스로의 양심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곳이 고모령 양심과일가게다. 비오는 날은 매출이 준다. 20만 원 안팎이다. 그러나 많이 팔리는 날은 매출이 98만 원까지 올랐다. 하루 200여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 씨와 부인 이 씨는 과수원에서 일하다가도 수시로 내려와서 소쿠리를 채워 놓는다. 가끔씩은 잔돈을 바꿔달라는 손님들 때문에 가게에 들르기도 한다. 과일가게 앞쪽에는 시식용 과일도 놓여 있다. 흠집이 나서 상품가치가 떨어진 과일들이다. 덤으로 3개씩 더 가져갈 수도 있다.
여름에는 오후 11시까지 가게를 열어두기도 한다. 부인 이 씨는 "처음에는 좀 찜찜한 구석이 있었어요. 훤한 낮과 달리 밤 양심은 좀 다를 수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사람들에게 참 고맙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린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을 믿을 겁니다."
가격은 어떨까. 복숭아 한 상자(4.5kg)를 농협에 출하하면 1만 원 정도받는데 한 소쿠리에는 2.3kg 내외가 담긴다. 한 상자로 두 소쿠리를 담아내기 모자란다. 그런데 한 소쿠리에 5천 원만 받고 있다. 이 가게의 과일은 공판장 가격보다 싼 편이다.
글·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국민의힘, '보수의 심장' 대구서 장외투쟁 첫 시작하나
대통령실, 추미애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원칙적 공감"
문형배 "선출권력 우위? 헌법 읽어보라…사법부 권한 존중해야"
장동혁 "尹 면회 신청했지만…구치소, 납득 못 할 이유로 불허"
李대통령 지지율 54.5%…'정치 혼란'에 1.5%p 하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