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창립 80주년 맞은 경북광유㈜

운송법 변해도 '한우물 파라' 기업정신 그대로

▲ 박윤경 경북광유(주) 대표는 올해 회사가 80주년을 맞았듯 앞으로 주유소가 한 곳이 남더라도 기름 사업을 계속 해
▲ 박윤경 경북광유(주) 대표는 올해 회사가 80주년을 맞았듯 앞으로 주유소가 한 곳이 남더라도 기름 사업을 계속 해 '장수기업 신화'를 이루겠다고 했다. 이상철기자 finder@msnet.co.kr
▲ 경북광유(주) 현관 앞에는 국내 최초로 사용된 수동식주유기가 서 있다.
▲ 경북광유(주) 현관 앞에는 국내 최초로 사용된 수동식주유기가 서 있다.
▲ 경북광유(주)가 창립80주년을 맞아 발행할 사사에 들어갈 사진들.
▲ 경북광유(주)가 창립80주년을 맞아 발행할 사사에 들어갈 사진들.

대구시 중구 동인동2가 경북광유(주) 본사 현관 옆에는 범상치 않은 기계가 서있다. 바로 국내 최초의 '수동식 주유기'. 주름깔때기를 돌려 기름을 나오게 하는 이 기계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국내에 사용됐다. 기계에 켜켜이 쌓인 먼지는 마치 80년을 이어온 경북광유의 질긴 생명력과 오롯함을 보여주는 듯 했다.

"주유소 앞에 '대구·경북 납세번호 1호'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죠. 지역에서 법인으론 처음이라는 이야기죠." 박윤경(50·여) 경북광유(주) 대표도 창립 80주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KK(경북광유)'라는 문구가 찍힌 유니폼을 입은 그녀는 사사(社史) 편찬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창립 80주년 기념일인 10월1일에 맞춰 '경북광유 80주년 사사'를 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잠시 짬을 냈다며 기자에게 과거 사진들을 보여줬다. "1940~50년대만 해도 사진에서처럼 말 달구지로 기름을 옮겼어요. 당시만 해도 넉넉한 집에서조차 호롱불을 켤 때였죠. 장부엔 당시 운반 수단인 자전거나 리어카 숫자도 등록돼 있더라고요."

박 대표는 자연스레 회상에 잠겼다. "1960년대 초 아버지(고(故) 박진희 회장)가 경북광유 포항지점장을 했을 때였죠. 제 나이 5살쯤 됐을 거예요. 포항지점 앞에는 바다가 펼쳐졌고 구룡포에 탱크 저장소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의리가 무척 강한 분이었죠. 말단 직원이 아이를 낳으면 직접 미역이나 옷을 사들고 집에 찾아갔죠. 그러면 직원들이 깜짝 놀랐죠. 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후원도 서슴지 않았어요. 특히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친분이 돈독했죠. 그런 이유로 박 회장님께 10월1일 창립 80주년 기념일 때 축사를 부탁했어요."

박 대표는 "아버지는 도시보다 시골부터 최우선적으로 배달하라고 지시를 했다."고 말을 이었다. 다른 기름회사들이 도시로의 유통에 신경쓸 때 경북광유는 오지로 배달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오래 근무한 직원들 이야기로는 심지어 화원유원지에서 배로 탱크로리를 싣고 낙동강을 따라 다사 등지 곳곳에 기름을 날랐다네요. 시골로 기름을 운반하면 물류비가 많이 들어 거의 남는 게 없는데도 시골 곳곳으로 기름을 운반했죠. 그런 노력이 아직까지 신뢰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시골에 있는 농협을 가면 어려울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우리 회사를 모르는 곳이 없더라고요. 안동이나 청송 등에서는 SK, GS 등 정유 대기업들을 마다하고 아직까지 우리하고만 거래를 하고 있죠."

고(故) 박재관 회장이 일제시대인 1927년 일본인 오일상을 받아 대구오일상회로 출발, 80년을 이어온 경북광유. 지난해까지 2천2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탄탄한 중견기업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1969년 할아버지(고 박재관 회장)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가 첫번째 위기였죠. 아버지가 그 전에 사업에 관여는 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사업을 물려받았죠." 다행히 1973년 오일쇼크가 회사를 다시 살린 계기가 되었다. 기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거래처마다 기름을 서로 받기 위해 외상을 다 갚아 자금줄이 확 트이면서 회사가 화려한 부활을 했다는 것. "당시엔 오전에 주유소 문만 열면 택시가 늘어서 있었고 우리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선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하는 등 회사가 활기에 넘쳤어요."

또 다른 위기는 IMF 때였다. 1997년에 주유소 거리 제한이 없어지면서 주유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가 터져 고금리로 애를 먹었다는 것. 여기에 고 박진희 회장이 간암으로 갑자기 타계하면서 후계 갈등도 있었다. 자매 6녀 가운데 결국 박 대표와 맏언니가 회사 지분을 50%씩 똑같이 나눠 가졌다. 경북광유는 2005년10월 박 대표의 경북광유와 맏언니의 한국광유로 분리된 것이다.

숱한 어려움을 겪고도 지금까지 건실함을 이어온 비결에 대해 박 대표는 "한 우물만을 팠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많은 기업들이 규모가 커지면 다른 사업에 손을 많이 대잖아요. 1990년대 우리 회사가 전국 100대 기업군에 들 때 여기저기서 다른 사업을 하라고 권유가 많이 들어왔죠. 하지만 아버지는 일본에선 우동집을 해도 대를 이어 우동만 한다면서 주위의 권유를 만류했죠. 에너지는 항상 필요하기 때문에 기름에만 고집하겠다는 거였지요." 박 대표는 그런 아버지 생각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지역에 대한 여러 봉사활동도 80살 경북광유를 있게 한 배경. 특히 학교 다닐 때 럭비 선수를 했던 고 박진희 회장의 럭비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대한럭비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면서 1980년대부터 매년 경산중이나 평리중, 신암중 등 럭비 팀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박 대표는 경북 경산시에 럭비구장을 짓기 위해 100억 원 상당의 땅을 내놓기도 했다. "내년에 천연잔디 럭비구장이 세워지면 2009년부터는 아버지 호를 딴 송화전국대회도 열 계획이예요." 박 대표는 경산의 한 장애인 시설에 작은 성당도 짓는 등 아버지 못지 않게 지역 봉사에 앞장서고 있다.

"앞으로 주유소가 한 곳이 남더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성심껏 이룬 경북광유를 지킬 거예요. 대체에너지가 나오더라도 100년, 아니 200년 기름 사업을 하는 것이 저의 바람이죠."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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