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시조산책-채천수 作 '가을 외상값'

눈부신 저 가을 강에

기막힌 외상값 있네

이미 떠난 양친 몸값

한 사내 아내 밥값

낙엽은 또 고지서로

발끝마다 붐비네.

가을 강에서 '외상값'을, 그것도 '기막힌 외상값'을 떠올리는 착상이 참 기막힌데요. 이 한마디에 온 가을의 정서가 다 실린 듯합니다. 먼 길을 더디 흘러 이제 막 노을에 잠겨 드는 강물은 강물대로 눈부신 빛의 잔치를 베풉니다.

'몸값'과 '밥값'은 기실 부모와 아내의 다른 이름인 것. 그렇듯 몸을 받고 밥을 얻고도 갚을 길이 없으니, 기막힌 외상값일 수밖에는. 삶이 남긴 외상값은 도무지 종잡을 길이 없습니다. 한세상 건너면서 차마 떨치지 못한 갖가지 미련과 후회들, 그게 다 외상값이니 낭패지요.

가을 강 앞에서는 누구나 눈부신 피의 소모감을 느낍니다. 시조 3장의 고적한 행간 속에 말라붙는, 마른 피. 바람이 불 적마다 또 다른 외상값 고지서들이 발밑에 붐빕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자꾸만 늘어나는 외상값. 갚을 길도 떼먹을 길 없는, 오오 하염없는 외상값.

박기섭(시조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