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범보다도 더 무서운 날

내가 어렸을 때 손꼽아 기다리던 날은 추석이나 설 명절이었다. 그 날 만큼은 먹을거리도 많았고 웬만큼 잘못해서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어서 더욱 더 기다려졌었다. 뿐만 아니라 못 보던 집안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 평소에는 떼를 써도 구경하기 힘든 새 옷을 떼를 쓰지 않아도 입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정작 어머님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셨다. 명절만 다가오면 늘 입에 달고 계시던 말씀은 '범보다도 더 무서운 날'이라고 하셨는데 그때만 해도 그 말뜻을 몰랐다. 그러던 것이 내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다보니 즐거워야 할 명절을 겁내야 했던 어머님의 그 한숨 속에 숨겨진 뜻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범보다도 더 무서운 날들이, 그리고 납덩이보다도 더 무거운 짐들이 맏며느리인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절이면 좋아 날뛰던 자식들 앞에서 한숨으로 일관하셔야 했던 어머님의 고충이 새삼 명절 앞둔 시점에선 아리게 다가온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 한정된 주머니에서 새어 나가야 했던 차례상 준비는 늘 어머님을 괴롭히는 '범'이었다. 제물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생각해서 생략하거나 대충해서는 안 될 정성과 경건함이 깃들어 있어야 했기에 드는 비용도 당시의 호주머니를 생각하면 만만찮은 금액이었을 것이다. 자급자족의 한계를 벗어난 비용이 어머님의 허리를 휘게 했던 게 아마 '범'을 운운하게 했던 것 같다.

시대가 급 물살 속에 휘둘러 떠내려 오다보니 변한 게 너무 많았다. 그야말로 범보다도 더 무서운 명절은 이젠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운 날도 아니었고 손꼽아 기다릴 이유도 없다. 명절날이나 먹을 수 있던 먹을거리는 평소에도 넘쳐났고 새 옷은 언제라도 사 입을 수 있는 풍요로운 날들의 연속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사방팔방으로 뚫린 도로 덕분에 한나절이면 만나볼 수 있는 편리한 시대에 아무런 제약 없이 살고 있기에 명절의 개념이 바뀐 지 이미 오래다. 제물을 준비 할 비용 때문에 겁을 내던 예전과는 달리 차례상 준비하는 것에 겁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차례상을 맞춰주는 신생업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명절을 앞둔 시점에선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라고 한다. 제사도 콘도에서 지내는 것이 이젠 흠이나 흉이 되지 못하는 이상한 시대에 살다보니 나 자신도 그에 편승하는 것 같다.

명절이면 부엌에서 헤어나지 못해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순종했던 내 어머님 세대들이 있었는가 하면 지금은 '명절 증후군'이란 신종병명이 많은 며느리들을 옹호하며 나서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며 남성금지구역으로 금기시 되었던 부엌으로 남편들을 밀어 넣는 시대에 와 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명절 지낸 뒤엔 이혼율이 높아진다고 하던 어느 기자의 웃지 못할 기사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 높아진 이혼율 속에 감춰진 사건은 보지 않아도 뻔한 후유증은 자자손손 지키고 이어나가야 할 우리고유의 명절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적이 걱정스러워지는 요즘이다.

이영숙(경북 영주시 휴전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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