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內附가 남는 장사라고

임진'정유왜란 이후 영의정 유성룡이 실각한 이유는 개혁정책에 대한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과 선조의 반감 때문이었다. 강력한 民本(민본)정책을 추진한 유성룡에게 마지못해 끌려 다녔던 양반 사대부들은 전란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은 유성룡을 거세하려 들었다. 선조는 그런 조정 분위기를 방조 내지 조장한 끝에 파직 처분을 내렸다. 전란 중 자신의 뜻에 반하는 주장을 한 데 대한 괘씸죄였다.

유성룡은 임란 초기 선조의 생각과 달리 서울과 평양 사수를 주장하고, 세자 책봉을 관철시켰으며, 명나라 內附(내부)를 반대했다.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 가장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은 선조의 내부책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내부 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라는 언급이 있다. 왜란에 다급했던 나머지 주권을 통째로 바쳐 명나라의 속국이 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부 요청에 대해 명나라가 선조를 국경지방 한 귀퉁이 병영에 유폐시키려 한다는 말이 전해지자 그 생각을 접었다. 만약 명나라가 선조 일가를 후대하겠다고 했다면 압록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조선은 역사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그 책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로 몰린다. 10월 2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현 시점이 꼭 그런 느낌을 준다. 정부가 남북체제에 변동을 가져올 어떤 상식 밖의 카드를 내놓을지 국민들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특히 서해북방한계선(NLL) 논의는 핵폭탄 같은 사안이다. 정부 안에서는 NLL에 대해 안보개념(이재정 통일부장관)과 영토개념(김장수 국방장관)으로 논의가 엇갈려 있다. 영토개념이라면 논의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정부 방향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김장수 국방장관을 회담 후에 사퇴시킨다는 말까지 솔솔 흘러나오니 NLL에 변화를 주려는 의도가 짙어 보인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NLL은 50여 년간 우리가 지켜온 영토다. 6'25전쟁 때 흘린 피의 산물이요, 국가 안보에 없어서 안 될 마지노선이다. NLL이 밀리면 서해 방어가 어려워진다는 경고가 잇따르는 이유다. 수도권은 그러잖아도 장사정포나 미사일 같은 북한의 재래식 군비 앞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여기에 서해안까지 북한의 군사력을 전진 배치시켜준다면 서울은 2중, 3중의 안보 인질로 몰리게 될 형편이다.

정부는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는 존재다. 99.99%의 확실성만으로도 부족해 막대한 돈을 들여 0.01%의 대비를 하는 것이 국방이다. 이런 계제에 안보의 안마당을 내놓겠다는 정부는 결코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반역적 사고라는 비판이 지나치지 않다. 국민 누구도 그런 권한까지 정부에 위임한 적이 없다. 이는 국가 통수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생존권 사안이다. 그런 동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NLL은 결코 의제로 올려서 안 된다.

참여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핵 문제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정부의 임무를 팽개치고 북한 입맛에 맞는 의제만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통령이 북한체제를 선전하는 아리랑 공연 관람과 서해갑문 시찰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국가 정보의 수장이 북한을 안방처럼 들락거리고, 국방장관이 정상회담에 끌려가는 난센스까지 빚어지고 있다. 안보를 내놓고, 경제를 내놓고, 정신까지 종속시키면서 그래도 남는 장사라고 우기는 실정이다.

남한의 한반도정책은 오랫동안 북한에게 주체성과 주도권을 빼앗겨왔다. 보수정권의 기능주의적 대북접근과 운동권 정부의 햇볕정책이 그 원인이다.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헌법적 가치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반란집단으로 규정돼야 할 북한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판이 다.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핑계로 엄청난 돈을 퍼부었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남한뿐이다. 핵 재앙까지 덮어쓰게 됐다. 최악의 계급독재, 인권탄압, 생활고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을 못 본 척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심을 구걸하기에 바빴다. 이번 회담이 명나라에 나라를 팔고자 했던 선조의 내부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눈을 떠야 한다. 나라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의 이념이 실종된 남북교류의 허구성을 깊이 성찰해볼 때다.

朴 珍 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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