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이틀 앞두고 노인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가까운 산에 다녀오겠거니 했는데 지리산 종주를 한다는 것이었다. 칠순이 다 된 나이에 날씨도 궂은데. 추석이라고 노인이 집에서 할 일이 뭐 있느냐, 찾아올 사람도 없고. 평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산들이 명절 때면 조용해져서 아주 좋다는 것이다. 보통 때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떠나는 발걸음은 크게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진한 쓸쓸함과 외로움이 뒷모습에 묻어 따라갔다.
추석 전후 대구의 관문 도로는 차량의 홍수로 보통 1시간 이상 정체됐다. 그들 중 상당수는 관광휴양객들이었다. 해외 항공권이 일찌감치 동이 날 정도였으니 국내 유명 관광휴양지의 호텔과 콘도도 방 구하기가 어려웠다. 관광지의 흥청거림은 어느새 명절 연휴의 자연스런 풍정이다. 개중엔 추석이라도 딱히 귀성할 곳이 없고 집에 있자니 마땅찮은 신종 이산가족들도 없지 않지만, 추석이고 차례고 볼 것 없이 연휴라면 즐겁게 노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덩달아 관광휴양지에 노인들도 제법 늘었다. 좋게는 자식 덕에 호강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나 별로 마음 편한 얼굴들은 아니다. 번들거리는 대리석 시설들에 어울리지 않는 비교적 누추한 차림새로 말 안 듣는 손자를 따라다니며 쩔쩔매는 것이 공통적인 모습들이다. 결코 즐거운 휴가도 아니고 명절은 더군다나 아니다. 뜨뜻한 구들막에서 손자들의 재롱을 즐기는 것이 제격인데 이를 포기하고 쓸쓸한 날씨에 수영복을 입고 어설프게 따라다니는 노인들의 별난 호사 앞에 추석의 정취는 없다.
오늘의 추석은 무기명의 민심을 드러내는 각종 설문조사에 잘 담겨있다. '명절 증후군'이 핵심이다. 조사 대상 주부의 45%가 명절증후군을 호소했다. 추석 며칠 전부터 소화불량에 우울증까지 겹쳐 고생을 한다. 귀성 북새통을 치르고 난 후에도 한참 간다. 예삿일이 아니다. 국민 보건, 문화 전승 차원의 중대 사태 아닌가. 명절을 명절답게 만드는 주역은 주부들인데, 종부의 기상은 사라졌다 하더라도 불과 며칠 안 되는 북새통을 못 견뎌낼 정도로 체질이 허약해서야 명절이 명절로서 온전히 지켜지기는 글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남자들 '명절증후군'도 만만찮다.
오순도순 만들면서 먹으면서 새록새록 정을 쌓아 가는 추석의 대표 음식 송편도 귀찮다. '제발 사 먹었으면 하는 음식' 1위에 올랐다. '추석 음식을 모두 사서 쓰자'(24.4%)가 '모두 손수 해야 한다'(17.1%)를 앞질렀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송편 만들기냐. 나물 무치고 부침개 만드느라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빈둥거리는 시누이는 오죽 밉나(23.5%), 꼼짝 않는 동서(19.2%)와 추석 준비 끝난 뒤 등장하는 친척(18.2%), 내내 잠만 자는 남편(16.4%), 배려 안 해주는 시어머니(13.1%) 모두 밉기는 마찬가지다. 친척들의 '돈'직장'자식 자랑'은 지독히도 듣기 싫고, 학생은 진학 얘기, 처녀'총각은 결혼 얘기 듣기 싫어 죽을 지경이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더 있다 가라"는 배려가 가장 끔찍스럽다.
조사 결과만 보면 명절은 가히 폭발 직전의 알력과 갈등의 휴화산이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폭발해서 풍비박산난다. 이런 결과는 결국 귀성의 집이 싫고, 그 집에 사는 어른, 노인 뵙기가 지긋지긋하다는 말로 해석되어 무리가 아니다. 사실상 '명절증후군'의 실체인지 모른다. 불과 며칠인데 조금 고생할 수는 없을까.
차라리 내가 떠나지. 노인은 산으로 갔다. 추석은 조상에 인사와 감사를 드리고 가족'친척 있음을 고맙게 여기는 날이다. 살아있는 조상인 부모 어른, 노인을 위무하는 날이다. 그리고 조손 간의 소통, 아이들 간의 소통을 만드는 중요한 날이다. 그 가운데 사랑과 웃음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추석은 문자 그대로 쓸쓸한 가을 저녁일 뿐이다. 노인은 툇마루 밖의 조락을 바라볼 뿐이다.
돌아올 날이 넘은 것 같은데 산으로 간 노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金 才 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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