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나라 고종의 칠순 잔치 하객인 연암 박지원의 문장을 따라 거대한 대륙 청(淸)으로 들어갔다. 낯선 대륙의 문물을 실용적인 학문으로 접목시키려 했던 그의 호기심은 만리장성의 위용이나 화려한 아방궁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한 장의 기왓장과, 여자들의 전족과, 그곳의 기후에 집중했고 그의 문체는 당당하고 섬세했다.
이 당당하고 섬세한 조선의 남자와 동행하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한 컷의 작은 스냅도 그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면 생명력을 얻어 새롭게 깨어났고 그의 입을 통해 정립된 언어들 모두 깊고 진솔한 사상의 정수였다. 긴 여행을 거치면서 그는 끊임없이 정신의 순수 발원지가 어디인지 이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했다.
최상의 가치에 근접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의 본질을 말하고 언어를 동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18세기 조선의 남자 연암은 끊임없이 사색하고 기록했다. "…그는 이내 술 두 잔을 손수 따라서 내게 권한다. 나는 계속해서 술 두 잔을 마셨다. 그가 내게, '만주 말을 할 줄 아십니까?'라고 묻기에 나는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중략)…물살은 아주 빠른데 배따라기 소리를 다같이 불렀다. 사공이 노력한 덕분에 배가 살별(彗星)이나 번갯불처럼 빨리 달린다. 잠깐 아찔한 순간에 하룻밤이 지나간 것 같았다."('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의 산문은 금세 시공을 초월하여 내게로 건너왔고, 내 안에 집을 지었고, 나는 그의 문장 속에 갇혀서 가을을 보낸다. 그가 혜성처럼 빠르게 보낸 하룻밤을 나도 보냈고 그가 건넌 빠른 세월의 강을 나도 건넌다. 소멸하고 생성하는 것들 모두 이 강물 속에 있고 반짝이거나 어두운 것들 다 이 강물 속에 녹아있다. 사람들은 모두 거기서 절망하고, 절명하고, 영원을 꿈꾼다.
18세기 어느 여름 밤 연암은 낯선 문물과 살 같은 세월의 속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고뇌하고 성찰했다. 그와 나는 21세기 내 작은 방에서 만났고 금방 죽이 맞았다. 조선의 남자 연암 박지원은 해학과 섬세함으로 그의 여정에 나를 끌어당긴 셈이다. 뜨겁고 비루한 여름밤을 배는 아찔하게, 우기의 세찬 강바람에 흔들린다.
도대체 이 낡고 작은 배로 어떻게 멀고 먼 대륙에 닿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세계의 본질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열하일기는 시공을 초월해 삶이라는 끝없는 대륙을 항해해 갈 것이다. 이것은 곧 사상가이자 조선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의 힘이고 고전의 힘이다. 이 배에 동승하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송종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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