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조직에는 이른바 '사내(社內) 정치'가 존재한다. 미국'일본 등 외국에서도 '오피스 폴리틱스(Office Politics)'라는 용어가 공공연히 쓰인다. 사내 정치 혹은 사무실 정치란 정부 조직이나 기업체의 구성원인 개인 또는 집단이 자신의 기득권과 입지를 공고히 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최근 들어 많이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사내 정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정치'라는 용어에서 풍기는 야합과 결탁, 줄세우기, 아부, 음모 등의 뉘앙스가 강하다보니 사내 정치를 잘한다는 말은 칭찬보다 비난일 경우가 많다.
◇ 사내 정치는 필요하다
모 기업체 대구지역본부에 근무하는 박모(42) 차장은 후배들로부터 이른바 '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후배들이 보기에 지방대학 출신에다 업무 능력도 크게 뛰어나지 않지만 승진도 빠른 편이고, 특히 본부장의 신임은 절대적이다. 비교적 고객 관리도 쉽고 실적도 좋게 나오는 포스트를 항상 차지하고 있다보니 본사에서는 박 차장을 출중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후배들은 알짜배기 포스트를 독점하면서 저 정도 실적은 당연한 것 아니냐, 오히려 전임자에 비해 실적이 좋을 것도 없다고 술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불만을 털어놓지만 말 그대로 그저 불만일 따름이다. 하지만 박 차장이 같은 직장내 고교 후배에게 털어놓은 '비결'을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다른 후배들은 '과연 난 사람'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와 사택에서 생활하는 본부장을 위해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함께 저녁 술자리를 갖는다, 한달에 한번 이상 주요 고객들과 조를 맞춰 주말 골프를 친다, 본사에서 손님이 내려오면 본부장이 놀랄만큼 확실하게 대접하며 본부장에 대한 노골적이지 않은 칭찬을 늘어놓는다 등등. 결국 전임 본부장들은 서울에 올라가서도 박 차장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후임 본부장에게 훌륭한 후배라며 알짜 포스트를 계속 맡길 것을 알아서 당부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사내 정치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그것을 덮기 위한 행동이나 실적을 부풀리기 위한 단순한 의미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성실함이나 기본적인 업무능력을 기본으로 둔 상태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다양한 인간관계 전반을 의미한다는 것.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이정태 교수는 "정치가 여러 권력의 권위적인 분배를 뜻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 사내 정치 역시 제한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펼쳐지는 다양한 활동 중의 하나로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가 있어도 평소 신망을 얻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다."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줄 인물들을 평소 사귀어두는 것을 과연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봐야할 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결국 '나는 죽어도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타이밍과 분위기를 조절할 줄 모른다는 뜻일 수 있고, '성격이 직선적인 것일 뿐'이라는 말은 대화 기술이나 상대방 배려가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한 변명이라는 말이다. 열심히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다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쪽으로 열심이냐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달라지겠지만.
◇ 섣부른 사내 정치는 금물
대구에서 손꼽히는 기업체에 다니는 A모(42) 씨는 8년째 과장 직함을 달고 있다. 과장을 달 때만해도 입사 동기 중에 가장 빠른 편에 속했다. 자신감이 넘쳤고 사내에서도 두루두루 좋은 평판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2년간 승진심사에서 미끄러지기만 했다.
처음 승진에서 누락될 때만해도 그럴 수 있다고 여겼지만 올해도 고배를 마시면서 A씨는 고민에 빠졌다. 평소 자신을 아끼고 챙겨주던 모 이사 B씨마저 등을 돌리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인사과에 근무하는 입사 동기와의 술자리에서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특정 라인으로 분류됐다는 것. 얼마 전 임원으로 승진한 고교 선배 B씨 라인이라는 소문이 사내에 파다하다고 했다. 때문에 승진심사때마다 다른 임원 C씨가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했고, 그 탓에 갓 승진한 B씨는 말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는 것. 그는 초급 과장 시절, 업무 문제로 C씨와 언성을 높였던 기억이 났다. B씨만 믿고 자신감에 차 있었던 그는 어느새 '낙동강 오리알'이 돼 버렸다.
현재 몸담고 있는 기업에서 임원으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사내 정치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섣부른 사내 정치는 오히려 화를 부른다고 임원급 직장인들은 말한다. 일찌감치 어느 라인으로 분류됐다면 자기 능력과는 관계없이 그 라인의 부침에 따라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 세상은 갈수록 무서워지고 있다. 비록 특정 라인이 일정기간 보호해주고 키워줄 수 있겠지만 그 효용가치가 떨어지고 오히려 라인의 정점에 오른 사람에게 방해라고 여겨질 때는 가차없이 제거당할 수 있다. 실제 정치보다 더 살벌한 셈이다.
◇ 사내 정치는 오히려 독이 된다.
지난 8월 인크루트와 리서치 전문기관 엠브레인이 직장인 2천 108명을 대상으로 사내 정치 실태를 조사한 결과, 73.8%는 '사내 정치는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들 중 절반 가량인 43.3%는 '사내 정치는 나에게도 필요없고 회사에도 도움이 안 된다', 37.2%는 '나에게 필요하지만 회사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답했다. 그만큼 사내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또 취업교육전문사이트 잡스터디(www.jobstudy.co.kr)와 온라인 교육포털 에듀스파(www.eduspa.com)가 지난 10일부터 이틀 동안 직장인 382명을 대상으로 사내정치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0.9%가 사내 정치에 휘말려 스트레스를 겪어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무능력한 사람이 실력 있는 사람을 찍어 눌러 희생을 당했던 경우를 목격한 직장인도 전체의 61.3%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 한 중소기업체에 다니는 장모(37) 씨는 "전체 직원이 300여명 남짓하다보니 누가 잘하고 못하는 지 입소문으로도 알 수 있는데도 특정 인맥, 학맥이 형성되고 그런 사람들이 나름대로 출세하는 모습을 보면 허탈해진다."며 "특정 부서 일부 인사들이 정보를 독점하고, 사장을 중심으로 장막을 치고 아랫사람들 이야기를 막아버리는 형국이다보니 될대로 되라는 식의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말했다. 모 금융기관 한 간부는 "연차가 높아질수록 학연, 지연에 얽매이는 경향이 강하다."며 "특히 지역 모 고교, 지역대학 특정학과 중심으로 인맥이 형성되다보니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자연스레 아웃사이더가 된다."고 했다.
포털사이트내 직장인들의 애환을 다룬 이야기방에도 사내 정치는 단연 화제다. 한 네티즌은 "친목을 다진답시고 학연, 지연들끼리 모임을 갖는 모습을 보면 그저 순수한 의도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 밀어주고 끌어주기가 너무 팽배해있다."고 푸념했다. 다른 네티즌은 "가끔 파벌들이 나눠어 날 뛰는 모습을 보면 과연 CEO가 저런 상황을 알고 있는 한심스럽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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