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바람이 훔쳐내는 땀의 진한 냄새마저 얼어붙는 겨울, 산을 오름은 신년을 맞아 삶의 샅바를 한껏 옥죄어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신년에 오른 오대산은 장엄했다. 태백준령의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내로라하는 명산과 달리 산 전체가 불교의 향기로 가득한 오대산은 그 산세가 깊이있다. 특히 주봉인 비로봉의 장관은 굳이 새해 다짐을 공고히 하려는 등산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발아래로 보이는 준령들은 크게 그러나 가볍게 바람처럼 살것을 주문한다.
비로봉에서 상왕봉을 잇는 눈길 능선은 싸리나무와 주목군락에 핀 눈꽃도 절경이다. 나부끼는 눈발이 만든 상고대와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오직 나의 두 발에 의지해 마침내 정상에 서는 기분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감동이자 쾌감이다.
산행의 처음과 끝에 둘러본 상원사와 월정사는 각각 국보 한점씩을 품고 있었다. 상원사 동종과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고즈넉한 산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상념들을 정리해보는 것도 겨울산행의 또 다른 멋이다. 가파른 '할딱' 고갯길에선 삶의 고비마다 주저앉기보다 이겨낼 의지를 다질 수 있고 평이한 능선길에선 큰 욕심 없이 현재에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겸손을 배우게 된다.
제철이 아니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기에 눈 덮인 산을 오르는 것은 가히 겨울산행의 백미이다.
하루의 설렘이 새로운 일 년의 희망과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왕이면 눈 덮인 산을 오르며 한 발 두 발 찍히는 족적에 다짐을 새기기 위해서 찾은 오대산이다.
초입의 길가 얼어붙은 계류엔 잔설이 내려 있다. 푸른 전나무 군락이 하늘을 가리는 조용한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린 끝에 만난 '적멸보궁(寂滅寶宮) 문수성지(文殊聖地)'. 거석에 새겨진 황금빛 음각 글씨가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을 향하는 출발점이 되는 상원사 입구임을 알린다.
표지석 옆 갓이 핀 송이버섯을 닮은 관대걸이는 세종이 맑은 계곡물에 목욕하면서 의관을 걸어놓은 장소이다. 이 곳에서 약 300m를 걸으면 상원사에 든다.
◆문수도량과 적멸보궁
화려한 일주문도, 거대한 사천왕상도 없는 상원사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 도량이다. 종루를 지나 너른 절 마당에 서면 문수전을 중심으로 전각과 선원이 서설 깔린 오대산을 병풍삼아 가람을 이룬다. 선원의 빗장 틈 사이로는 동안거 중 휴식을 취하는 수행승 몇몇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오대산 자락 풍광은 푸른 침엽수와 서설이 조화를 이뤄 동양화폭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하다.
아까부터 종루 옆 한 앙증맞은 작은 전각이 유독 눈에 띈다.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숨긴 둔 듯이 문은 굳게 닫혀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국보 36호인 상원사 동종이 보관돼 있다. 현존하는 동종 중 가장 오래된 이 동종은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고루 갖춘 대표적 범종으로서 창살문을 통해 보이는 비천상 양각이 무척 유려하다.
절을 빠져나와 산길을 올랐다. 한참을 그렇게 산길을 걷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겉옷을 벗어 재껴 배낭에 얹고 걸은 지 20여분. 가파른 산비탈에 5개의 처마가 서로 겹쳐진 특이한 건축모양의 암자가 나타났다. 중대사자암이다. 여기서 다시 오른쪽 등산로를 따라 15분을 더 올라야 적멸보궁이다.
오대산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으로 조금 전 산 아래 상원사의 여러 전각 중 대웅전이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부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는데 굳이 대웅전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불교 5대 성지 중 한 곳답게 가는 길엔 아름드리 상록수가 겨울임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을 자랑하는 적멸보궁에는 3칸의 팔작지붕 안엔 연화대를 대신한 붉은 방석을 놓고 부처의 정골 사리가 고이 모셨다. 신라 성덕여왕 때 당나라에 유학 갔던 자장율사가 들여온 것이다.
'지금처럼 맑은 이 마음자락을 내내 잊지 않게 하소서!' 저 멀리 오대산 봉우리들이 반갑게 달려와 풀썩 안긴다.
◆하얀 눈길 따라 오르는 비로봉
적멸보궁에서 비로봉을 오르는 산행코스는 산세가 압권이다. 눈 내린 등산로 양 옆으로 펼쳐진 하얀 겨울설화가 환상적이며 어머니의 따뜻한 품처럼, 문수보살의 자비로운 미소처럼 사방으로 뻗어가는 준봉들의 능선은 또 얼마나 부드럽게 물결치는 지.
한 줄기 겨울바람이 싣고 온 눈꽃이 눈앞에 흩날리자 문득 온 산에 부처의 향기가 그득해짐은 찰나의 착각일까.
그렇게 눈 쌓인 등산로를 걸은 지 20여분. 길이 갑자기 가팔라진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 맞닥뜨리는 고비길이다. 숨이 턱에 차오르지만 새해 각오를 다지는 마음의 샅바를 바짝 끌어당겨본다.
이 때 숲에서 두 마리의 작은 겨울새가 날아들었다. 회청색의 날개와 노란 배 깃털이 무척 예쁜 녀석들은 잠시 곁을 맴돌다 다시 뽀르르 숲으로 돌아갔다. 적막한 오대산 등산로에서 만난 짧고 작은 인연에 힘이 솟는다. 주변 산 능선도 어느 새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몸은 땀범벅이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정상을 향하는 발걸음도 많이 가벼워졌다.
◆눈 덮인 비로봉 정상에 서서
해발 1천563.4m의 비로봉 정상에 서면 겨울 산의 풍모에 압도되는 일대장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보이는 건 온통 산자락 뿐. 동서남북 전 방향으로 태백의 준령들이 군무를 추며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들의 물결이다. 하늘과 맞닿은 먼 지평선 아래엔 푸른 서기(瑞氣)가 내비치는 운무가 피어나고 있다. 아래세상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선계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풍광을 눈에 오래 담고파서, 마음에 깊이 새기고파 아예 눈밭에 퍼질러 앉고 싶다. 지평선 너머로 한없이 달려가는 시선, 공기는 또 어찌 그리 맑고 투명한 지.
◆하늘정원 길을 따라
비로봉의 벅찬 감격을 뒤로 하고 능선을 따라 상왕봉으로 걸음을 옮긴다. 바람마저 잦아든 능선 길은 겨울 산치고는 믿기지 않은 정도로 조용하고 따사롭다.
힘든 등산의 부담도 없어서인지 올라올 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동안 산세를 돌아볼 여유도 생긴다. 누군가 먼저 간 발자국을 따라 걷는 길은 하늘정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버티는 주목과 관목이 길을 열고 파란 하늘이 길라잡이로 나서는 길. 푹신하게 밟히는 눈의 감촉에 피로도 한결 풀리고 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산행의 대미는 전나무 숲으로 유명한 월정사에 다다른다.
웅장한 지붕 곡선과 장엄한 가람배치가 돋보이는 절 마당에 서면 국보 48호인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늘씬한 높이에 비해 안정된 느낌을 주는 조각솜씨에 또 한 번 반하게 된다. 탑 안에는 공양하는 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산을 빠져나오며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자 하얀 눈을 머리에 인 비로봉이 우뚝하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오대산 가는 길=중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영동고속고로로 갈아 탄 다음 진부 IC에서 내려 좌회전, 주문진 방향으로 길을 잡아 가면 오대산 이정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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