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진 후에는 침이 고인다"
25살, 삐죽 머리를 한, 얼핏 개구쟁이 같아 보이는 그는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였다. 2005년의 김애란이다. 그것만으로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그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어 두 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가 나왔다. 각종 문예지에 청탁받아 썼던 8편을 묶었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에 탁월한 문장도 아니다. 그의 작품은 독특하지도, 어떤 반전 같은 것도 없다. 흔히 젊은 작가의 글에서 나타나는 참신한 감각도 없다. 재기발랄한 상상력도 없다. 그래서 놀란다. "왜 김애란이 주목받는가?"
그런데 글을 읽을수록 '침이 고인다.' 그의 글에는 오직 '생활'만이 있다. 그가 그려내는 '생활'이라는 것은 톡톡 튀는 젊은 20대가 아니라 취업난에 찌든 20대다. 30대 전문직 여성의 오피스텔이 아니라 계약직 학원강사의 반지하방이다. 그래서 친근하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라 푸근하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익숙하다. 일상생활의 가벼운 이야기를 결코 가볍지 않게 소설로 끌어오는 힘, 그것이 김애란의 매력이다.
표제작 '침이 고인다'는 두명의 여자 이야기다. 학원 강사인 나에게 얹혀살기 시작한 후배. 동거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담았다. 어느 날 친하지도 않았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냥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하루'라는 단정에 후배를 받아들인다. 술을 마시고 얘기하던 중 후배의 과거를 듣는다. 후배가 어렸을 때 인삼껌 한 통만 쥐어주고 엄마는 떠나버렸다.
껌을 씹으며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는 어른이 된 지금도 참혹한 과거를 떠올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침이 고인다고. 아직도 간직해온 한 개 남은 껌을, 후배는 반을 잘라 나에게 내민다. 그것 때문에, 아픔과 과거를 공유하게 된 까닭에 나는 후배에게 제안한다. 있고 싶을 때까지 있으라고. 나는 함께 하는 생활의 행복을 느낀다.
그러다 고독이 그리워질 즈음 그 행복이 지겨워진다. 점점 그녀가 싫어진다.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는 것, 말투가 닮아가는 것, 심지어 같은 날 생리 하는 것도. 후배를 내보낸 후 고독을 즐기면서 후배가 남긴 반쪽 껌을 씹는다. 침이 고인다.
인간의 가벼움은 '나'로 대변된다. 함께 있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온갖 합리적인 이유로 동거의 이점에 대해 생각하다가 막상 내보내려고 하니 그 합리적인 이점들이 단점으로 바뀌어 버린다. '하루'라는 정해진 시간 때문에 받아들인 마음. 그 하루 밤 동안 알게 된 사람과 동거를 결심하는 가벼움. 그 가벼움을 김애란은 결코 가볍게 쓰지 않았다.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후배에게 더 있으라고 했을 때 후배의 말. "괜찮으시겠어요?" 흡사 바람둥이 남자가 순진한 여자에게 제안하는 말 같다. "시간이 늦었네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배려를 가장한, 책임을 미루려는 말.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어 놓는 말. 이런 말을 할 때는 자신의 속마음을 의심해 봐야겠다. 배려인가? 책임전가인가?
칼국수 장사를 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담은 '칼자국'은 작가의 나이를 의심케 한다.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 엄마. 다정한 말 한마디 보다는 죽는 시늉으로 놀리던 엄마. 바람 핀 남편, 돌아올 것 같지 않은 남편을 위해 매일 저녁 생선을 굽는 엄마. 엄마는 그렇다. 그래서 엄마인가 보다. 그런 엄마가 죽고 이틀 뒤 엄마의 가게에 온 나는 시장기를 느낀다.
엄마의 오래된 칼로 사과를 깎아 베어 문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김애란은 자식 대신 목숨을 바치는 식의 거창한 모정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 집에 있는 엄마를 이야기 한다. 티격태격 타투면서도 금세 웃고, 부끄러워하다가도 미안해하고, 잔소리가 귀찮다가도 그리워지는 그런 엄마. 서른 살도 안 된 작가가 그런 엄마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간 게 두렵고도 놀랍다. 꾹꾹 힘주어 써내려간 것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자판을 두드린 솜씨는 아니다. 한 문장 한 문장 마음의 흔적이 느껴진다.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어느 비평가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김애란의 소설 속 엄마처럼, 우리들의 엄마도 변함이 없다. 해가 바뀌어도 여전하다. 어린 시절, 그 어느 순간의 새해에도 그랬다. 추운 수돗가에서 수건을 둘러주고 얼굴을 문질러 대던 거친 손. 아프다고 말해도 대꾸 없이 코에 갖다 대던 무심한 손. '흥' 하고 힘껏 풀고 나면 아무 거리낌 없이 다른 손으로 콧물을 씻어버리던 손. 바짝 말라 까칠해진 수건으로 그냥 쓱쓱 몇 번 문질러 주던 손. 갈라진 손등에선 쩍쩍 소리가 날 것 같던 엄마의 손. 그 손이 보고 싶어졌다. 김애란을 만난 오늘은.
김애란은…
1980년 인천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졸. 2002년 제1회 대산문학상 '노크하지 않는 집' 당선되어 등단. 2005년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소설집 '달려라 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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