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금이정의 독서일기]백년 동안의 고독/G. 마르케스

화려한 기억.무거운 과거도 한 줌의 재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은 마술이다. 소설은 허구보다 더 기이한 사실의 세계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허구의 세계를 단단하게 얽어서 언어 속에 감쪽같이 집어넣어 버린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설의 세계는 신비롭고 현란하다.

이 소설 또한 독특하고 기이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 현실이라는 날실과 환상이라는 씨실로 짜여진 '날아다니는 양탄자' 위에 독자를 태우고 순식간에 가상의 시공간을 실감나게 넘나든다.

이야기는 '마콘도'라는 마을의 부엔디아 가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마을은 사람이 한번도 죽은 적 없는 지상낙원이다. 그러나 집시가 가져온 자석과 거울은 '문명'이라는 이물질로 평화로운 마을에 스며든다.

편협하고 배타적인 '종교'가 들어와 사람들을 갈라놓고, 착각과 광기의 '정치'가 들어와 전쟁을 일으키며, 바나나공장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자본주의'가 부패와 억압을 항의하던 노무자들을 집단 학살하는 사태까지 일으킨다.

외부적인 환경과 상황이 바뀌자 사람들 속에 내재해 있던 온갖 부정적인 씨앗들이 발아한다. 마을은 낙원이 아니라 좌충우돌하는 인간군상들이 빚어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다.

권력과 싸움을 좇아다니는 이, 물질적, 성적 욕망 때문에 삶을 모조리 낭비해버리는 이, 초월적인 세계에 빠져서 현실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이념' 때문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내달리는 이, 불우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반작용으로 폭군이 되어버리는 이. 증오하는 사람의 수의를 짜면서 평생을 보내는 이, 근친상간으로 돼지꼬리가 달린 아기를 낳는 이.

문명의 빛이 들어오자마자 마을이 무질서해지고 황폐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 사람들이 불안해지고 과격해지고 왜곡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빛의 난반사가 삶과 죽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고독'이라는 무시무시한 심연을 얼핏 비추었기 때문일까?

그 고독을 서로 온전히 나눌 수 없어서일까? 그래서 아비는 제 어둠을 물려주듯 자신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혹자는 황금물고기를 만들었다가 녹이고 또다시 만들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또 누군가는 수의를 짰다가 풀고 다시 짜고 풀기를 평생 동안 거듭하였을까. 여기서 한 가문의 역사는 어쩌면 인류 전체의 역사일 수도 있고, 책 속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일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신화와 역사와 문학이 한데 어우러진 이 책은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색채까지 농후하다. 그래서 평자들은 하나 같이 이 소설에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마치 큰 인형 속에 작은 인형, 작은 인형 속에 더 작은 인형이 자꾸 나온다는 러시아 인형처럼, 이 책은 인류사 안의 시대사, 시대사 안의 가족사, 가족사 안의 개인사가 그야말로 빼곡하게 중첩되어 있다. 가장 작은 사건부터 가장 큰 사건까지 다층적, 점층적인 묘사와 상징적인 구조가 복잡한 듯 하면서도 무척 빼어나다.

그러나 백 년의 가족사건 천 년의 인류사건 결국은 낡은 종이 위의 한 줄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가 아무리 무겁고 추억이 아무리 화려하거나 끔찍해도 그것은 다만 한 줌의 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 책은 말한다.

부엔디아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 양피지에 기록된 글자를 해독하자마자 마콘도 마을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bipasory@hanmau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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