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성도의 오페라 이야기] ⑧티토 스키파

전설속의 테너 이야기(8)―티토 스키파(Tito Schipa, 1888~

"티토 스키파가 노래할 때는 모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이 말은 두살 아래 명테너 베냐미노 질리가 한 말이다. 그만큼 그는 20세기 가장 완벽한 리릭 테너의 한 규범이었다. 그의 음성은 온갖 찬사로 수식된다. 즉 매혹적이고 우아하며 발성이 너무 자연스럽고 절대 오케스트라와 소리경쟁을 하지 않고, 완벽한 두성 발성을 하여 오늘날도 많은 테너 지망생들이 배워야 한다는 등등이다.

그는 대중가수와 같은 인기를 누렸다. 1954년 나이 65세 때 아르헨티나 방문에서는 훌리오 9번가와 발카르체 거리에 10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폭동이 일어난 듯했다고 전해진다.

스키파는 1888년 부츠처럼 생긴 이태리지도의 발뒤꿈치에 해당되는 아주 가난한 마을 레체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나중 군대징집을 고려하여 그의 아버지가 고의로 늦추었다는 말이 있다. 성악적 소질은 조숙하여 학교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거장 조반니 알바니는 처음으로 그를 지도하였으나 나중에 그 마을 주교가 뛰어난 스키파의 음성을 듣고 매료되어 자비로 학비를 대었다.

메르카단테, 제룬다 선생 등은 개인교습으로 엄격한 보컬 훈련을 시켰고, 1908년 19세때 제룬다 선생은 자선음악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스키파가 밀라노에 가는 여비를 보태 주었다. 밀라노에서 피콜리 선생에게 1년 남짓 배운 뒤 1910년 2월 4일 베르첼리에서 '라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로 데뷔한다. 1911년 이태리 통일 기념일엔 로마에서 마스네의 '베르테르'를 불렀다. 1914년 성공적인 남미 연주를 끝내고 1915년 베르메 가극장에서 토스카니니 지휘로 '라트라비아타'를 공연하고 라스칼라에 '이골공'으로 진출한다. 1917년 작곡가 푸치니가 직접 스키파를 초청하여 '제비' 초연의 주역을 맡게 된다.

스키파에게 맞는 오페라는 가볍고 서정적인 것이었다. 그의 유연하고 감칠맛 나는 음성의 전성기는 1919~1932년 사이 시카고 시빅 오페라 극장 시절과 1932~1935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시절이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전세계 가극장이 월급을 모두 삭감할 때 메트를 떠난 질리와 라우리 볼피의 공백을 스키파가 메운 셈이었다. 그가 즐겨 다룬 오페라는 '마농', '마농 레스꼬', '미뇽', '라크메', '베르테르' 등 가벼운 이태리 오페라 역이었다.

그는 영화 애호가였다. 또한 탱고 음악을 좋아해 스스로 많은 곡을 쓰고 리코딩도 하였다. '라쿰파르시타'는 그의 애창곡이었다. 특히 아르헨티나를 13회나 방문하여 탱고와 오페라를 불렀다. 1954년에는 에바 페론 앞에서 오페라를 공연했다. 그러나 그는 30년대 무솔리니와 나치에 협력한 관계로 그들이 무너진 후 사회적 냉대를 받았다. 그의 나이 73세, 1962년 미국 순회공연은 그의 과거 전력을 모두 용서받는 때이기도 했다. 그의 말년은 온갖 낭비와 사치, 여성편력 등으로 좋지 않은 소문도 많았다. 영광과 후회 없는 삶을 뒤로하고 1965년 12월 16일 뉴욕에서 당뇨병 합병증으로 투병하다 타계했다.

윤성도(시인·계명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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