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일현의 교육프리즘] 자연과 정서

아프리카에서 기아와 내전을 전문적으로 취재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케빈 카터 기자가 1994년 수단 남부의 어느 식량센터 근처에서 아사 직전의 소녀를 발견했다. 걸을 힘이 없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소녀 곁에는 살찐 독수리 한 마리가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셔트를 눌렀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란 제목으로 사진이 발표되자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진으로 그는 퓰리쳐 상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기자가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셔트를 누르기 보다는 먼저 독수리를 쫓아내고 소녀를 구해야 했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사진을 찍은 후 독수리를 쫓았다고 항변했지만 비난이 그치지 않자 그 기자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살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끔찍한 광경을 담은 사진은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슷한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아왔기 때문에 감각이 둔해지고 무덤덤해 져서 그 때만큼 충격을 받지 않는다. 비슷한 장면을 계속 봄으로써 신선함과 충격이 사라지게 되는 현상을 '이미지 중독'이라고 부른다. 폭력과 살인 등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계속 보게 되면 실제로 일어난 폭력과 살인 사건도 별 충격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지난달 일본의 어느 전철역에서 무차별 칼부림을 벌여 여러 명을 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평소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게임광이었으며, 게임을 하듯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컴퓨터 게임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도시 학생들의 정서 불안과 폭력성은 학교 건물과도 관련이 있다는 연구 논문이 나온 적이 있다. 예전의 교사(校舍)는 주로 목조 단층이었다. 이런 건물에서는 바람소리, 벌레소리, 비오는 소리가 그대로 교실에 들어올 수 있어서 학생들의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늘의 대도시 콘크리트 건물은 자연의 소리를 차단하여 풍경을 삭막하게 만들고 학생들의 성격을 거칠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콘크리트 건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거기에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이다. 야간 자율 학습 등으로 콘크리트 건물에 밤낮없이 갇혀 있어야 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처지가 딱하기 그지없다.

안양 초등학생 살인 사건 이후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 학원 차량이 올 때까지 바깥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집과 학교와 학원만을 오가도록 강요당하는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제 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주말만이라도 컴퓨터와 학원에서 해방시켜 자연 속에서 정서를 순화시키는 시간을 갖게 해야 한다. 목련꽃 피는 4월이다. 산과 들에서는 귀엽고 아름다운 봄꽃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이번 주말에는 온 가족이 가까운 야산이나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논두렁길을 함께 걸어보자.

윤일현(교육평론가·송원교육문화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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