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국제 투기자본에 맞서는 로펌 변호사들

보이지 않는 제국/ 윤상일 지음/ 지상사 펴냄

현직 변호사가 쓴 장편소설이다. 제목 '보이지 않는 제국'이 암시하듯 이 책은 군대나 영토 없이 전 세계를 삼키려는 금융자본의 파괴력, 혹은 음모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 지배를 꿈꾸는 국제 금융자본은 국경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국경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국경 속에 든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이용한다. 심지어 애국심으로 무장한 시민단체까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일하도록 조종한다. 시민단체 활동이 오히려 기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기업을 몰락시키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국제 금융자본이 한국의 '장미은행'과 '로펌'을 동시에 합병하려고 한다. 이들의 전략은 대단히 섬세하며 거대하다. 국제적 규모의 자본과 기업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정부에도 압력을 가한다. 사모펀드, 시민단체, 회계법인, 언론, 로펌, 정부의 경제부처까지 조종한다. 합병하고자 하는 회사의 내부 인사들까지 하나씩 공략한다. 그것도 각 개인의 취향에 딱 맞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국제 금융자본은 그만큼 세심하고 치밀하다.

M&A를 추진하는 이들의 전략은 쉽게 말하면 '쓰리 쿠션'이다. 이들은 결코 눈에 보이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이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쪽을 치고, 저쪽을 공략하기 위해 이쪽을 친다. 그래서 그들의 공격은 파상적이고 갈피를 잡기 힘들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목표는 뚜렷하고 모든 공격은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다.

소설은 외국 투기자본의 적대적 M&A를 폭로하는 소설이지만, 그들의 치밀한 인수합병 시나리오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만큼 세련되고 효과적인 공격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적대적 M&A에 거의 무방비 상태인 한국의 기업과 은행, 로펌은 속수무책이다. 일단 투기자본의 그물망에 걸리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안쓰럽지만 '마땅하다'는 마음이 들 정도다.

소설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세계 지배를 꿈꾸는 금융자본의 음모에 맞서는 로펌 변호사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줄거리가 씨줄이라면 날줄은 매우 정교하다. 각 장면은 작가의 상상력 범위를 넘어 생동감과 리얼리티를 갖추고 있다. 한 장면씩, 한 꺼풀씩 벗겨지는 M&A 시나리오는 놀랍다. 아마도 현직 로펌의 대표 변호사인 작가는 국제 금융자본의 M&A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을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외환은행 헐값 매각과 론스타가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제국'은 일종의 추리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든 미덕 두 가지를 갖고 있다. 대부분 추리소설은 결말 부분에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는 형식을 취한다. 작가가 사건을 장황하게 펼쳐놓았지만 주워 담지 못해서 발생하는 결과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거의 대부분 사건과 음모를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풀어준다. 결말 부분에 억지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그럼에도 상상력이 부족한 독자를 위해 마지막에 전체 사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 설명이 또 무척 자연스럽다. 패배를 맛본 '최강 로펌' 변호사들이 재기를 꿈꾸며 지난번 '패배 과정'을 살펴보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흔히 추리류 소설은 한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할 뿐 독자를 향해 어떤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흥미로운 줄거리 외에 많은 '생각거리' '질문'을 던진다. 합병 위기에 놓인 '최강로펌'의 변호사들은 제 각각 입장이 다르다. 김일세 변호사는 합병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다. 애국주의 측면에서 그는 '배신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가 합병에 반대하는 이수연 변호사와 나누는 대화는 흥미롭다.

"이봐, 수연이 정말 답답하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우리 회사 외국 회사 따지는 거야. 직장이 외국계 회사면 어때? 연봉 많이 주고 근무환경 좋으면 좋은 직장이지. 외국 회사라고 도둑질하거나 무슨 불법적인 업무를 하는 게 아니잖아. 외국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 연봉 많이 받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애국하는 거 아냐?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수연아,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네가 너무 나이브한 것 같아. 우린 더 이상 법학도도 아니고 사법연수생도 아니야. 우린 우리의 전문지식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프로라고. 우리가 우리 몸값을 높게 쳐주는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니냐고."

M&A를 추진하는 국제 금융자본의 알렉스가 '최강로펌' 박두현 변호사에게 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잘 아시겠지만 이젠 국경이나 이념은 아무 의미 없어요. 자본은 물론이고 기업이나 로펌도 국적이 어디 있겠어요?"

이 소설은 합병에 반대하는 변호사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이들 몇몇 변호사는 합병한 로펌으로 따라가지 않고 '가난한 독립'을 택한다. 그리고 국제적 실력을 키워 M&A 전문 로펌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소설을 끝이 난다. 그러나 작가는 외국계 로펌으로 가서 '부자로 살기를 원한' 변호사들을 나쁘다고 비판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애국심'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지만 어느 쪽도 옳거나 그르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애국심은 때때로 나라와 개인을 지키는 든든한 성곽이 되지만, 위정자가 애국심에 기대는 바람에 허약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국경과 고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철학자는 고향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고향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제국'은 한편의 흥미로운 소설인데, 공연히 국경과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법률시장 개방, 로펌 변호사, M&A 등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더욱 흥미를 느낄 만한 소설이다. 316쪽, 1만1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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