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님은 먼 곳에(2008)

남편이 뭐기에?

지금이야 젖은 낙엽처럼 쇠락했지만, 한때 사내라는 이유로 하늘이었던 적이 있었다. 대(代)가 끊긴다고 전답을 팔아 군대에서 빼내 오기도 했다. 조선시대도 아니다. 불과 30년 전이었다.

순이의 남편은 대학물을 먹었다. 온갖 고상을 다 떤다. "니, 사랑이 뭔지 아나?" 군대 면회 간 아내를 두고 이런 소리를 내뱉으며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여자가 떠났다는 이유로 월남에 자원해 가버리는 무책임한 철부지다. 3대 독자를 전쟁에 보낸 시어머니는 그녀를 닦달한다. "내는 본처가 아니면 첩의 애라도 봐야겠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내 마음 모두 그대에게 드리리/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는 찾을 수 없어요.'

영화 초반 김추자의 '늦기 전에'를 부르며 수동적이던 수애는 이제 변하기 시작한다. 이름도 '순이'에서 '써니'로 바뀐다. 사랑을 아느냐고? 네가? 네가 말하는 사랑은 뭔데?

'님은 먼 곳에'는 베트남전이라는 극한에서 남편을 건져내는 시골 아낙의 분투기다.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의 이준익 감독의 음악 영화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비롯해 고향 떠난 이들의 망향가 '대니 보이', 밴드의 경쾌한 '수지 큐' 등 음악들이 전편에 흐른다.

그래도 이 영화의 압권은 김추자라는 이미지다.

그녀는 1970년대를 뒤흔든 섹시가수다. 시쳇말로 허리만 돌리면 섹시한 줄 아는 요즘 여가수들과는 격을 달리한다. 그녀의 노래에는 도발적이며, 체제전복적인 이미지들이 담겨 있었다. 공연장이 많지 않던 시절, 전국 영화관에서 이뤄진 '김추자 리사이틀'은 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김추자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한 한국 여인상을 뒤흔들었다. 순이의 몸속에, 영혼 속에 이글대는 것도 김추자였다.

시인 박미영은 '님은 먼 곳에'를 본 후 김추자만 뽑아내 시를 썼다. 그녀의 경이로운 출현을 '불온서적 초판을 펼칠 때처럼'으로 표현하고 있다. '끓는 냄비 뚜껑 맨손으로 열 때처럼.' 동구밖 당나무 아래에서 '늦기 전에'를 부르는 수애의 마음이 그랬을까. '뒤란에 숨겨 논 양귀비처럼' 은밀하게, 그래서 더욱 강렬하고 유혹적이다.

시인은 '삐라'를 통해 머릿속을 빨갛게 적시는 붉은 10월을 얘기하고 있다. 빨치산이 출몰하는 피아골, 가벼운 칼빈 총 한 자루를 들고 볼리비아의 밀림을 누비며 세상을 구하려고 했던 체 게바라의 이미지까지 끌어온다.

죽을 각오로 전쟁터에 가서 막상 죽음을 목도하고는 공포에 떨고 있는 위선 덩어리. '쇼쇼쇼', '사이키델릭'이란 격렬한 표현이 아니고는 위선의 가림막이 벗겨지지 않을 것 같은 조바심이 눈을 가린 붉은 손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화가 권기철 역시 뜨거운 레드를 전편에 채색했다. 무대에선 순이의 붉은 색 의상이 비에 젖는다. 뜨거운 대지를 적시듯, 소낙비는 순이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준다.

화가는 붉은 캔버스에 흰색으로 덧칠했다. 거침없는 붓이 마치 비처럼 느껴진다. 뜨거운 사랑, 단내 나는 열정, 단절의 상처를 적셔주고 있다. 그러나 한때 침묵하고, 잠적하던 김추자처럼 여전한 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허스키 보이스 록의 몸짓으로도 벗겨지지 않던 위선의 가림막이다. 몸을 팔아 전쟁의 구렁텅이에서 남편을 구한 순이도 그랬을까.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님은 먼 곳에(2008년)

감독:이준익

출연:수애, 정진영, 정경호

러닝타임:126분

줄거리:가끔씩 동네 아주머니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인 '순이'(수애)는 외아들 '상길'(엄태웅)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시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매달 군대 간 남편을 면회 간다. 그러나 남편은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거기에 베트남전에까지 자원해 버린다.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떠나기를 결심한 순이. 베트남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무작정 '정만'(정진영)을 쫓아 위문공연단의 보컬로 합류하여 '써니'란 새 이름을 얻은 그녀는 화염과 총성이 가득한 베트남, 그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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