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선비론

많은 사람들이 선비를 한자어로 생각하지만 순수 우리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선비로 번역되는 한자는 크게 둘로 분류된다. 하나는 '儒(유)·儒生(유생)·儒者(유자)' 등의 유학자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士(사)·士人(사인)' 등의 사대부를 뜻한다. 유학자(儒者)가 선비로 번역되지만 모든 유학자가 선비로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 속된 유학자를 뜻하는 俗儒(속유)나 비루한 유학자를 뜻하는 陋儒(누유)는 가짜 선비이다.

선비는 어떤 사람일까? 성호 이익의 '가난은 선비의 일상이다(貧者士常)'란 글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가난은 선비(士)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선비란 벼슬이 없는 자의 칭호이니, 어떻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비가 꼭 벼슬이 없거나 가난한 儒者(유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도 그 처신에 따라 선비를 뜻하는 眞儒(진유)와 권력과 이익을 좇는 俗儒(속유)로 나눈다.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바친 封事(봉사)에서 "세상 사람의 常情(상정)으로 말하자면, 선비란 자는 진실로 얄미운 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율곡은 "선비는 정치를 논하라면 멀리 唐(당)·虞(우)의 고사를 인증하고, 임금에게 간하라면 어려운 일만을 권유하며, 벼슬로 얽어매도 머무르지 않고, 은총을 내려도 즐겨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뜻대로만 행하고자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선비의 出仕觀(출사관)이 '때가 되면 나가서 도를 펼치고 돌아와서는 학문을 닦는다'는 것이듯이 벼슬길에 나왔다고 임금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선비들에게 정치는 도를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선비는 비단 동양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정의로운 사람은 바로 그 정의라는 것과 결코 달라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정의와 전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플라톤이 주창한 이런 철인(哲人) 정치를 수행하는 사람이 선비인 것이다.

속유들이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반면 선비들은 조정에 나오면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公義(공의)를 추구하는 것이 임금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이는 "선비는 義(의)를 좋아하고 속된 무리는 利(이)를 좋아하니, 이를 좋아하면서 전하를 사랑하는 자가 있을 수 없으며, 의를 좋아하면서 전하를 잊는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진실로 얄미운 자'인 선비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사람은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게 마련인데, 임금에게도 쓴 말만 골라서 하니 인생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논어』 '이인(里仁) 편'은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는 공자의 말을 전한다. 도를 추구했기에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선비는 文臣(문신)의 독점물도 아니었다. 사육신 성삼문의 부친이었던 무신 성승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제거하려다 사형당하는데, 형장으로 향하면서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니/ 일평생 그 마음을 어길 수 있으랴/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나는 안다/ 현릉(문종릉)의 소나무 잣나무가 꿈속에 어른거리네(食人之食衣人衣/所一平生莫有遠//一死固知忠義在/顯陵松柏夢依依)"라는 시를 읊었다. 성승·성삼문 부자는 조선 각지에 상당한 토지를 가진 부자였지만 이것들을 단번에 버리고 도의 실천에 목숨을 걸었다. 이런 선비들은 당연히 피지배층에게 존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가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上典)이 오셨다'고 환호했다"고 전한다. 선비는 피지배층의 존경도 한몸에 받았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俗儒論(속유론)」에서 "참된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財用(재용)을 넉넉하게 하고 文識(문식)과 武略(무략) 등을 갖추는 데 대해 필요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선비가 정치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던지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며 見危受命(견위수명)을 언급했다고 전한다. 현 정부의 주요 구성원들이 선비라면 이런 말 자체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나 속유들을 써놓고 선비의 처신을 원한다면 이 또한 緣木求魚(연목구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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