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의 떠오르는 명산 비슬산] ②대견봉 가는 길

▲ 달빛 아래 홀로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선 대견사지 삼층석탑.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의 황제가 이곳에 절을 짓고 대국에서 본 절이라 하여 대견사(大見寺)로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2일 오후 7시15분, 니콘 D3, 14~24㎜ 렌즈, ISO320, 조리개 5.6, 2분 노출.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달빛 아래 홀로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선 대견사지 삼층석탑.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의 황제가 이곳에 절을 짓고 대국에서 본 절이라 하여 대견사(大見寺)로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2일 오후 7시15분, 니콘 D3, 14~24㎜ 렌즈, ISO320, 조리개 5.6, 2분 노출.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정상인 대견봉 아래에 자리한 도성암. 암자 뒤에는 신라시대 도성 선사가 도통한 곳이라고 해 도통암이라 이름 붙은 큰 바위가 있다.
▲ 정상인 대견봉 아래에 자리한 도성암. 암자 뒤에는 신라시대 도성 선사가 도통한 곳이라고 해 도통암이라 이름 붙은 큰 바위가 있다.

비슬산 구비 길을 누가 돌아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는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을 듯 이어진 길 어어질 듯 끊인 연(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찌는 걸까

--무산 오현 선사의 '비슬산 가는 길' 중에서--

새해 첫 주말 비슬산을 찾았다. 찌푸린 하늘은 비슬산 초입에 들어서자 진눈깨비를 뿌린다. 현풍에서 차로 20여분 올라오자 유가사 주차장이 있다. 차를 버려 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진눈깨비 탓인지 날씨가 몹시 쌀쌀하다. 소나무 사이로 신라고찰 유가사가 보인다.

◆옛 스님들의 향기=유가사 입구에는 예전에 보이지 않던 '비슬산 가는 길'이란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오현 스님(백담사)의 '비슬산 가는 길' 시비와 대여섯 걸음 뒤엔 일연 스님의 '讚 包山二聖 觀機 道成'(찬 포산이성 관기 도성) 시비가 앞뒤 하며 세워져 있다.

유가사에서 비슬산(옛 이름은 包山 또는 苞山)과 인연이 있는 두 성사(聖師)를 기리기 위해 지난해 5월 시비를 세웠다. 시구처럼 인근 산속에서 까투리가 금방 날아오를 것 같다. 스님들의 상념이 묻어 있는 것 같은 풍경이다. 더구나 진눈깨비마저 내리자 스님이 등 뒤에서 헛기침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정상인 대견봉을 오르고픈 급한 마음에 일주문인 천왕문을 멀리한 채 길을 재촉한다.

곧바로 수도암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많은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 정진했지만 지금은 비구니 승이 절을 지키고 있을 뿐 적막하기 짝이 없다. 예전만큼 선찰도량으로 명성을 이어가지 못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고불고불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길 한쪽 음지에는 잔설이 군데군데 쌓여있다. 동행한 박흥명 달성군 기획감사실장은 "여기서 도성암까지 열일곱 굽이를 돌아야 한다"며 은근히 겁을 준다. 이 길은 스님들이 도성암에서 정진하는데 양식·나무 등 생필품을 유가사에서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우마차 길을 닦았다고 한다. 지금은 콘크리트 포장이 돼 있어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50여분을 오르니 '만지송(萬枝松)' 팻말의 소나무가 떡 버티고 있다. 수령이 100년을 훌쩍 넘긴 소나무로 주민들에겐 일찍이 알려졌으나 최근 도성암 길을 확장하면서 알림판을 세웠다. 만지송은 다산의 상징으로 주민들이 이곳에서 자식 낳기를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민담도 전한다.

◆성현 4명의 탄생 예언=만지송을 뒤로 하자 도성암이 나타난다. 도성암은 유가사와 함께 비슬산에서 제일 유명한 사찰이다. 도성암은 선산 도리사와 함께 스님들이 참선하는 도량으로 유서가 깊다. 비슬산은 불교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비슬산에는 100여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비슬(琵瑟)에는 임금 왕(王)자가 네개나 들어가 있는데 이곳에서 큰 인물 네 분이 탄생한다는 예언이 있다. 지금까지 두 분이 나왔고 앞으로도 두 분 성현이 더 나올 길지(吉地)라는 얘기다. 이미 출현한 성현은 '포산이성(包山二聖)'으로 신라시대에 살았던 도성·관기 선사를 말한다. 도성암은 도성이 오도(悟道·도를 깨달음)를 한 곳으로 후인들이 그를 기려 세운 사찰이다. 또한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이 산에서 일천명이 출세를 기다려 남은 과보(果報·인과응보)를 받겠다"고 예언했다.

도성암 주지 대선 스님은 "도성암은 선원(禪院)으로 특히 제대로 공부를 했는지 검증하는 도량이며 포산이성을 포함해 지금까지 이곳에서 58명의 선지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동안거(冬安居·음력 10월부터 정월 보름까지 수행하는 일)인 지금 이 암자에서 6, 7명의 스님이 공부 중이다.

◆산 정상이 통행로?=대견봉으로 가는 길은 눈 때문에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절 뒤로 길이 있었으나 스님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절 뒤편 길을 막았다. 온 길을 뒤돌아 나와 길로 내려오면 오른쪽 오솔길에 '정상 가는 길'이란 팻말이 있다. 500여m를 가면 유가사 쪽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길과 만난다. 가파른 길의 연속이다. 얼마 가지 않았는데 온몸이 땀범벅이다. 길에는 잔설이 남아 미끄럽고 위험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추자 20m 높이의 바위가 버티고 있다. 도성이 수도 끝에 도를 통하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도통바위다. 바위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틈과 돌로 담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도통바위를 지나자 길이 더 가팔라진다. 산을 가슴으로 안고 오르는 기분이다. 산이 높아질수록 눈이 수북하다. 다른 등산객은 아이젠을 착용했는데 준비 없이 온 우리 일행들만 거북이 걸음이다. 그렇게 30여분을 갔을까. 산마루를 오르자 시야가 확 트이면서 이제 능선을 따라 정상이다. 멀리 도심과 팔공산, 가야산 그리고 굽이굽이 낙동강이 보인다. 등산객들이 겨울 비슬산의 정취에 흠뻑 빠져 있었다. 정상에는 사통팔달 길이 뚫려 있는 게 재미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산 주위를 둘러가지 않고 꼭대기를 바로 넘어 경남·북을 오갔다. 정상이 호연지기를 키워주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활동영역으로 쓰였다는 게 비슬산의 매력이 아닐까.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 '포산이성(包山二聖)'

비슬산에는 '포산이성'에 대한 전설이 곳곳에 남아있있다. 포산이성은 신라때 성사(聖師)인 도성(道成)과 관기(觀機)를 말한다. 그들은 신라인이며 속세를 떠나 비슬산에서 살았다.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고 관기는 남쪽 마루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들은 서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들은 달밤에 노래하며 왕래하곤 했는데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 싶으면 산속의 나무들이 남쪽으로 머리를 숙여 맞는 시늉을 했고, 관기가 도성을 보고 싶을 땐 나무들이 북쪽으로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득도한 이들은 홀연히 사라졌는데 후인들이 도성이 좌선하던 굴 아래에 절을 지어 도성암이라 했다. 관기가 있던 산마루는 관기봉이라 했다.

도성암부터 관기봉 사이에는 이상하게도 억새와 칡이 눈에 띄지 않는데 그에 얽힌 사연도 있다. 도성이 관기를 만나러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맸다는 말을 들은 비슬산 신령(靜聖天王)이 길목의 억새와 칡을 모두 없앴다고 한다. 포산이성이 떠나고 7백년 뒤 고려때의 보선국사 일연이 '포산이성'의 자취를 찾아 도성암에서 며칠을 머물며 '찬(讚) 포산이성 관기 도성(包山 二聖 觀機 道成)'을 지어 삼국유사에 남겼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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