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피아노/ 궐과 아내

금실 좋은 부부의 대화법

1920년대 초에 발표된 현진건의 작품이다. 배경과 소재가 촌스럽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통한다. 궐은 가정의 화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일본에서 대학을 마쳤다.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했던 '촌스러운 아내'는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궐은 중등교육을 마친 신식 여성과 재혼했다. 두 사람은 뜻이 잘 맞았다.

(궐의 눈에) 아내의 비스듬히 가른 머리와 가벼이 옮기는 구두 신은 발은 만족을 주고도 남았다. 아내의 생글생글 웃는 듯한 눈매를 볼 때면 궐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두 사람은 단 둘이 사는 너른 집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마루 가운데 으리으리한 테이블을 놓고, 주위를 소파로 둘러 응접실을 만들었다. 놋그릇은 위생에 해롭다며 사기그릇, 유리그릇만 썼다. 조선사람들의 옷걸이는 거추장스러워 없애고 커다란 거울이 달린 양복장을 마련했다. 찬모와 침모를 두어 아내가 집에서 할 일을 없앴다. 두 사람이 하는 일은 독서, 정담, 화투, 키스, 포옹이 전부였다. 아내에게 일과가 있다면 이상적이고 화목한 가정에 필요한 물품을 생각하고 사들이는 것이었다. 아내는 놀랄만한 관찰력과 주의로 이상적인 가정에 꼭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생각해냈고 빠짐없이 사들였다.

어느 날 아내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가정에 없어서는 안될 물건을 생각해냈다. '어째서 이 물건이 이제야 생각이 났단 말인가'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노심초사 기다렸다.

"나 오늘 또 하나 생각했어요."

"무엇을?"

"알아맞혀 보세요."

"무엇일까….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나는 걸…."

"그것도 못 알아맞히셔요. 바로 바로 피아노!"

"오 옳지! 피아노!"

피아노라니!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이윽고 부부의 집에는 두시간도 지나지 않아 훌륭한 피아노 한 대가 들어왔다. 부부는 화려한 악기를 바라보며 기쁨이 철철 넘치는 눈웃음을 교환했다.

"마루에 서기(瑞氣)가 뻗친 듯 한 걸요."

"온 집안이 갑자기 환한 듯한걸."

문제는 두 사람 모두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피아노도 못 친담!'

'그러는 당신은….'

부부는 상대가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한 듯 웃었다. 칠 줄도 모르는 피아노를 진열해두고 즐거워하는 두 사람. 다른 사람 눈에는 이상한 가정, 정신나간 부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가정을 위한 이상적인 악기였다.

현진건의 소설 '피아노'는 신문물 세례를 받으며 살아가는 중산층의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소설집 '운수좋은 날'에 포함돼 있다.

만약 부부 중 한 사람이 '합리적인' 혹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칠 줄도 모르는 피아노를 사 들이다니!"라고 언짢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화기애애하게 웃음을 터뜨리기는커녕 큰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금실 좋은 부부란 그런 모양이다. 옳거나 그름, 이치에 닿느냐, 닿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두 사람이 동의하느냐 아니냐, 두 사람이 한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런 문제는 억지로 비위를 맞춘다고 될 문제도 아니다.

대형마트에서 직원의 실수로 계산착오가 발생했다. 직원이 사과했다. 착오가 난 부분을 다시 계산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나운 아내는 '계산도 하나 제대로 못한다'며 직원을 호통친다. 직원은 연신 사과한다. 뒤에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다. 아내는 소리치느라 계산대를 빠져나갈 생각을 않는다.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쏟아낸다.

'거기 대충 해결됐으면 나갑시다. 뒤에 사람들 기다리잖아요.'

이제 금실 좋은 남편이 거들 차례다.

"이 사람들이! 지금 기다리는 게 대수야? 계산이 틀렸잖아! 이런 걸 바로 잡아야 한다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당신들?"

금실 좋은 부부는 그 날 저녁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만약 남편이 아내를 향해 '당신, 그만하고 나가지. 남 부끄럽게…'라고 말했더라면 한바탕 부부싸움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금실 좋은 부부의 요건은 객관적 합리성이 아니다. 가정의 화목을 원한다면 무조건 배우자 편을 들어야 한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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