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가 당선됐을 당시, 한국에서도 다문화가정 2세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희망사항일 뿐이다. 현재대로라면 100년 후에도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가장 큰 이유는 공부를 못하면 낙오자로 찍히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농촌지역 2세들의 사정은 더욱 좋지 않다. 빈곤 계층이 많고 교육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그간 주한미군 혼혈인들이 겪어온 '가난과 따돌림→학교 중도 포기→빈곤과 주변적 삶'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이들에게도 재연될 여지가 많다.
◆열악한 농촌 교육…'이중고'
"도시에 살았으면 한글을 잘 배워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텐데…."
농촌의 다문화가정 자녀들은 열악한 농촌 교육 여건과 부모로부터 말을 제때 배울 수 없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
결혼 4년차 필리핀 결혼이주여성 쉼그렌(24)씨는 유일한 한국어 선생님이 TV다. 한국어 교재는 남편이 1년 전 던져준 한글 사전이 전부다. 그나마 과수원, 벼농사, 축산 등 사시사철 쉴 새 없는 농사일에 한글을 배울 시간조차 없었다.
더욱이 3년 전 얻은 딸아이 수민(가명·4)마저 말을 제대로 못할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일상이 너무 바빠 돌볼 겨를도 없다. 유독 또래에 비해 발음이 어눌하고 말이 느린 수민이를 일찍 유치원에 보내려는 이유도 말을 빨리 배우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한 달에 20만원 정도를 교육비로 들여야 하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남편도 "나도 그냥 컸는데 그 많은 돈을 들여 아이를 대통령 만들 일이 있느냐"며 펄쩍 뛴다.
경북 구미의 한 시골 마을로 10년 전 시집온 판티항(38)씨는 "요즘 한글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먼 곳까지 차를 타고 나가야 하고 웬만한 노력 없이는 어렵다"며 "농촌에서는 TV와 사전이 예나 지금이나 유일한 한글 교육 수단이고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칠 여건도 되지않고 있다"고 말했다.
구미결혼이민자지원센터 장흔성 소장은 "농촌에서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적고, 이로 인해 2세들까지 말을 제대로 못하고 학습 부진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가난과 따돌림
베트남 엄마를 둔 경북의 한 초등학교 2학년인 준혁(가명·9)이는 늘 혼자다. 말을 어눌하게 하기 때문에 놀아주는 친구가 없다. 친구들에게 '왜 너만 몰라?'라며 놀림을 받기 일쑤다. 공책, 교과서는 온통 까맣다. 수업을 이해하지 못해 낙서만 한다.
선생님이 수업 중에 물어도 '그게 뭐예요?'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이다. 책가방도 항상 텅 비어 있다. 한글을 잘 모르는 엄마가 가정통신문을 이해하지 못해 준비물을 챙겨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준혁이의 실내화를 챙겨주는 것도 곧잘 잊어버린다. 엄마의 고국에서는 교내에서 실내화를 신는 게 습관화되지 않은 탓이다.
교사 A씨는 "준혁이가 사용하는 어휘는 또래에 비해 상당히 부족하고, 받침이 있는 낱말은 거의 틀릴 정도로 한글 구사력이 다른 학생에 비해 떨어진다"며 "가정통신문을 몇 차례 보내도 어머니가 글을 몰라 달리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가정 형편상 사교육을 시킬 수도 없다. 어머니 팜퓌엔(가명·30)씨는 자꾸만 뒤처지는 준혁이가 걱정스러워 남편에게 말해보지만 "한국 아이들은 원래 다 그렇게 자란다"며 핀잔만 받는다고 했다.
◆2세들의 높은 학업 중도 포기율
부모로부터 대물림되는 언어 발달 부진과 학습부진의 악순환은 다문화 2세들을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농촌에는 옆집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 정도로 가정사들이 속속 이웃에게 노출돼 있어 2세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경북지역 농촌에 사는 B(16)군은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다 포기했다. 초·중학교 시절 친구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깊어 더이상 학교에 다닐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 초교 때는 엄마의 이름이 길다는 이유로, 커갈수록 검게 변하는 얼굴까지도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다. 지난해 마련한 컴퓨터가 유일한 친구다. B군은 "학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가도 외톨이일 게 뻔하고 대학에 갈 가정형편도 못된다"고 말했다.
원희목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지난해 국제결혼가정 자녀의 재학 현황을 파악해 보니 대구지역 다문화가정 자녀 중 절반 이상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의 다문화가정 자녀 1천15명 중 홈스쿨링(부모에게 교육받는 재택교육)을 하거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은 559명었고 미취학률이 55.1%에 달했다. 학급별로는 고교생(만 16∼18세) 122명 중 107명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 미취학률(88%)이 가장 높았고, 중학생(만 13∼15세) 경우 전체 158명 중 120명이 미취학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부모가 선진국 출신일 경우 홈스쿨링의 비율이 높지만 그외 국가 출신들은 아이들을 그냥 놀리는 경우가 많다. 경북의 경우 중학생 154명 중 44명, 고교생은 89명 중 32명이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일선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연구개발실장은 "현재 다문화가정 2세들의 상당수가 초교 저학년이지만 몇년 후 이들이 초교 고학년, 중고교에 진학하게 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며 "다문화가정 자녀에게 실질적인 교육적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정확한 실태조사와 함께 획기적인 정책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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