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륵사 유물과 설화는 별개 사안

"서동요 의미 퇴색될 이유 없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로 인해 서동요 자체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의 명문이 미륵사는 "639년 좌평 사탁적덕의 딸인 백제왕후가 세웠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경을 넘나든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와 미륵사 창건 설화는 모두 거짓일까.

서동요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오는데,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연모한 서동이 밤마다 선화공주가 서동 방을 드나든다는 '서동요'를 퍼뜨려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내용이다. 역시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 설화는 무왕이 왕후와 함께 용화산 못가를 걷고 있을 때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자 왕후가 큰 사찰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을 무왕이 들어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서동과 선화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가짜라고 단정 짓기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다. 명문을 번역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명문은 오히려 '삼국유사'의 내용을 대부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무왕대(재위 600~641년)인 639년 미륵사가 창건되었다는 점, 또 왕후가 절의 창건을 주도했다는 명문 내용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백제사를 전공한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선화공주가 발원하여 세운 곳은 서탑이 아니라 바로 중원(中院·중앙목탑+금당)일 가능성이 있다"며 "절의 조성이 중원에서 시작해 서원과 동원으로 이어지는 등 시간차를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노 교수는 또 "무왕의 재위 연수가 41년인데다가 절이 완성된 이듬해인 640년에 왕이 사망한 점에 비춰 사탁적덕의 딸이 선화공주에 이어 후비였을 가능성도 있다"며 "고구려의 경우는 왕비가 3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절을 발원한 사람이 선화공주가 아니라고 단정하기에는 현 시점에서 너무 이르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 가사문학의 대가인 임기중 동국대 교수는 아예 서동요 자체의 의미가 퇴색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내용을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서동요는 그 본질이 허구성을 띤 설화"라며 "따라서 새삼 서동요가 허구라는 지적은 논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미륵사 유물과 설화로서의 서동요는 별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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