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래도 난 내길을 간다…'거장 빚는 손' 베이시스트 송홍섭

당대 최고의 베이스 주자이자 내로라하는 가수들을 키워낸 국내 최고 프로듀서 송홍섭(55). 그의 음악은 담백하면서도 헐겁다. 듣는 이를 압도하지 않고 여유롭게 발장단을 맞추게 한다. 그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단순히 연륜 때문은 아니다.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향해 흐른다. 쉰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20대 연주자들과 무대에 오르며 열정을 뿜어내는 장인이자, 음악적 고집을 꺾지 않은 고집불통이다. 40여년간 음악에만 몰두해 온 그가 대중의 '낯섦'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다. 지난달 30일 오후 라디오 프로그램 녹음 차 대구를 찾은 그를 만났다. 그는 3년 전부터 매주 일요일 방송되는 '송홍섭의 길모퉁이 음반가게' 코너를 진행 중이다. 반백(半白)의 거장은 오늘도 무대에 오른다.

◆초가집 감성의 떠돌이 악사

송홍섭은 3년 전 강원도 춘천에 터를 잡았다. 북한강 자락에 작업실을 꾸미고 장작을 패 불을 때며 산다. 음악을 하겠노라 가출한 지 35년 만의 귀가. "아내 건강도 나빠지고 저도 서울 생활에 애착이 없었어요. 숲 속이라 조용하고 음악 작업하기도 좋죠." 음악의 문을 열어준 건 4명의 형들이었다. 형들의 기타로 음악을 접했고, 학교 밴드부였던 형들을 따라 자연스레 밴드부 활동을 했다. "밴드부에서는 알토 색소폰을 다뤘는데 구강구조가 맞지 않은지 몰입할 수 없었어요. 관악기와 가장 비슷한 감성을 가진 악기를 찾다가 베이스 기타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연주 방식이 관악기 연주와 비슷해요."

연주법도 홀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외국 교본을 어렵게 구해 번역한 뒤 홀로 공부하는 식.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가 좋겠냐'고 물었다. "기세등등하게 집을 나왔던 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 1이 되던 해 가출을 감행했다. "음악에 대한 가족들의 삐딱한 인식을 바꿀 재주는 없었고, 몸으로 실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이유. 소년은 인천 연안 부두 인근 클럽에서 밴드 생활을 시작했다. 첫 월급이 700원. A급 연주자가 1천원을 받던 시절이다. 긴장감 속에 스탠더드 재즈와 팝의 고전들을 연주하며 연주 실력도 기초가 다져졌다. 그의 음악이 뿌리는 록음악이면서도 크로스오버 재즈의 느낌을 품고 있는 이유다.

1978년 그룹 '사랑과 평화'에 합류한 건 일대 전환점이었다. "사랑과 평화처럼 리듬을 심도 있게 구사하던 팀이 없었어요. 상당한 충격과 함께 배운 점도 참 많아요." 하지만 그는 1, 2집까지만 함께 한 뒤 그룹에서 탈퇴했다. 음악적 정서와 맞지 않았다고 했다. "수학적으로 디자인돼 있고 확실하게 연출된 음악을 견디질 못해요. 전체적인 균형은 잡혀있되, 진행되는 곡선이 예측 불가능한 음악이 제 정서거든요." 무명밴드를 오가던 그는 1983년 당대 최고였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베이스주자가 됐다. "일본 NHK 공연을 위해 임시로 들어갔다가 자리를 잡았어요. '미국은 모르겠는데 아시아는 잡을 테니까 도와 달라'는 조용필씨의 말이 꽤 멋있어 보였어요." 그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리더로 3년간 4장의 앨범을 냈다.

당시 함께 연주했던 멤버들이 피아니스트 김광민, 재즈 뮤지션 정원영, 김종진·전태관(봄여름가을겨울), 고(故) 유재하 등이다. 한양대 학생이던 유재하는 3번째 건반 주자로 밴드에 들어왔다. "재하가 자기가 쓴 곡이 있는데 용필이형이 불러보면 어떻겠냐고 부탁을 했어요. 일종의 로비였죠. 그 당시로는 볼 수 없었던 메이저 키로 이뤄진 발라드였어요. '사랑하기 때문에'였죠." 유재하의 노래는 조용필 7집에 실렸고, 그는 아직 원본 악보를 간직하고 있다. '위대한 탄생' 시절도 오래가진 못했다. 3년이 지나자 다시 '역마살'이 꿈틀거렸다. 그는 "음악적 감성이 훼손되지 않겠다는 본능적인 회피였다"고 했다.

◆거장을 만드는 거장

그가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진 건 편곡과 프로듀서 덕분이다. 김현식,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 유앤 미 블루, 이은미, 삐삐밴드 등 당대의 명반들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곡만 1천여곡에 이르고 절반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도 프로듀싱을 맡은 첫 1년간은 히트곡이 없었다. "밤새 연주자들의 키보드 운지법과 기타 연주방식까지 빈틈없이 짜서 준비를 했어요.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 꽉 짜맞춘 거죠. 그런데 어느날 즉흥적으로 녹음한 곡이 히트를 하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꼭 필요한 핵심만 정리를 하고 나머지는 연주자들에게 맡겼어요. 밴드의 본질적인 특징을 그제야 알게 된 거죠." 호기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3년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와 19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 영화음악에도 손을 댄 것. "'그 섬에 가고 싶다'를 할 때는 거의 매일 서울에서 진도까지 오가며 곡들을 만들었어요. 화면과 소리를 동기화시키는 고가의 장비까지 거의 다 구했을 정도로 투자를 했죠."

받은 돈보다 나간 돈이 더 많았다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컸던 셈. 그러나 불 같은 의욕도 열악한 제작 여건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한국영화의 후반작업을 했던 남산의 영화진흥공사의 시설로는 비싼 장비가 무용지물이었던 것. 실망스런 기억을 안고 맡았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오히려 반대 상황이 됐다. "작곡만 어영부영했는데 후반 작업을 호주에서 한다는 겁니다. 그 쪽은 장비가 다 갖춰져 있는데 막상 제가 준비가 안됐죠." 음악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그에게 세상이 안겨준 건 가혹한 대가였다. '삐삐밴드' 2기로 결성한 '삐삐롱스타킹'이 방송카메라에 침을 뱉은 일로 출연 정지를 당했고 음반 판매가 급격히 추락했다. IMF 한파는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대형 레코드 회사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그의 음반사도 부도를 맞았다. 가재도구에는 온통 빨간 차압딱지가 붙었고 하루 먹을 양식조차 없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한 음악을 할 수는 없다는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1년여간 전국의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음악판으로 돌아온 후에는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2002년 심근경색으로 의식을 잃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매달리는 작업스타일'이 화를 불렀던 것. 2004년에는 '봄여름가을겨울' 콘서트 첫날 공연을 마치고 급성췌장염으로 중환자실 신세를 졌다.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돌아온 그에게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은 '피닉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의 2집 앨범에 적힌 이름도 '더 피닉스 송홍섭'이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음악과 세상을 보는 눈도 단순해졌다"고 했다. "제 음악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정리가 됐고요.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굉장히 단순해졌어요."

◆내 별명은 피닉스(The Phoenix·불사조)

-주머니에 아이팟이 있던데, 주로 무슨 음악을 들으세요?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이 몇 명 있어요. 지난해 그래미 어워드 6개 부문을 수상한 재즈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제가 리듬에 대해 고민할 때마다 그를 통해서 많이 배웠죠. 또 퓨전재즈 그룹 웨더 리퍼트. (그가 손가락을 쫙 폈다.) 음악이 엄지에서 새끼손가락까지라면 각 손가락마다 약속이 있고 나머지는 연주자 마음이거든요. 약속한 부분만 지키고 또 개인의 능력에 따라 마음대로 가고. 요즘 음악은 한치의 틈도 없이 연출돼 있지만 이들은 헐렁해요."

-자식뻘인 젊은 학생들과 밴드를 결성했는데, 성에 차지 않을 듯한 젊은 음악인들과 함께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는 2006년 서울예대와 서울재즈아카데미 학생들과 함께 밴드 '더 피닉스'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음악성의 신선함을 유지하려는 이기적인 동기겠죠. 비슷한 세대의 연주자들 중에 음악 정신이 살아있는 이들이 드물어요. 음악가다운 품위를 지키면서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안되니까요. 좋은 연주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나이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예전 음악과 요즘 음악의 가장 차이가 뭐라고 보십니까? (그가 가장 오랫동안 진지하게 대답한 질문이었다.)

"음악은 다른 연주자의 소리를 들으며 반응하고 유기적으로 합쳐져야 됩니다. 가수와 세션이 함께 모여서 연주를 했던 예전에는 녹음을 한번에 성공할 수 있는 정확한 연주와 음악의 템포에 대한 이해, 다른 연주자와 앙상블 등에 대한 기술이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멀티레코딩을 하니까 각 파트별로 따로 녹음을 해요. 그러다 보니 합주의 개념을 잘 모르고 음악이 뚝뚝 끊어지죠. 마치 활동사진과 환등기의 차이라고 할까. 젊은 음악인들은 수많은 음악적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구동시키는 방법을 몰라요. 작곡을 하면 형태도 좋고 장르별로도 완벽하지만 굴러가질 않거든요. 그러니 음악에 힘이 없어지죠. 오죽하면 스토리가 있는 드라마에 음악을 얹어야만 간신히 듣겠어요?"

-요즘 자기 색깔을 갖고 음악을 하는 후배 뮤지션으로 누굴 꼽을 수 있을까요?

"장기하와 얼굴들. 재밌던데요. 개성이 너무 강해서 다음 판이 걱정되긴 한데, 그 정도로 개성을 갖고 하는 팀이 드물죠. 요즘 홍대 앞 여러 클럽에서 연주하는 밴드들은 연출을 너무 심하게 해요. 앨범을 내면 1년 중 반은 투어를 하고, 나머지는 클럽에서 마음대로 연주하며 재충전을 해야되는데, 클럽에서도 공연처럼 연출을 하니까 에너지가 다 소진돼요."

-3집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2월 말에 마무리해서 3월 출시를 목표로 작업 중이에요. '송홍섭, 학교에 가다'가 주제인데 9곡이 수록될 겁니다. 지난 앨범은 제가 작사·작곡·편곡, 노래까지 다 했는데 이번에는 작곡만 하고 작사와 노래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어요. 3집은 좀 황당해요. 제가 작곡을 하면서 주제를 정하고 가사를 써오라고 하면 완전히 자기 얘기만 써놓고 그랬으니까. 성에 안 차는 점도 있지만 포기했어요. 그냥 그 친구한테 헌납하는 걸로 하자 그러고."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뭡니까?

"아내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게 후회돼요. 지금까지 모든 걸 견디고 같이 와줬던 것만 해도 진짜 대단한 거죠. 지금도 제가 집이 없어요. 이사를 한 횟수만 대충 세어봐도 30번이 넘는다고 해요. 거의 1년을 못 넘긴 거죠. 사실 아내가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몇년 전에 입이 돌아갈 정도였어요. 화낼 입장도 못되는 거죠."

-10년 뒤 송홍섭은 어떤 모습일까요?

"앞으로 10년 정도 음악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대개 60세가 넘으면 물리적으로 연주가 힘들어지거든요. 65세까지는 무대에서 표현하고 싶은 걸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컨디션이 가능할 것 같아요. 그 이후에는 다른 관심사가 생기겠죠."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 송홍섭은?=1954년 생. 국내 최고 수준의 베이스 연주자이자 프로듀서다. 춘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 16세때 가출, 인천과 서울에서 밴드 생활을 했다. 1978년 그룹 '사랑과 평화'의 초대 베이시스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리더로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세션맨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조용필,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한영애, 유앤 미 블루, 전인권, 삐삐밴드, 이은미 등의 프로듀서로 수많은 명반을 제작, 감독했다. 1992년 1집 '내일이 다가오면'을 낸 뒤 14년 만인 2006년 2집 '미닝 오브 라이프 1(Meaning of Life)'을 냈다. 서울재즈학교에서 강의 중이며 후배 연주자들과 밴드 '피닉스'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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