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무책임과 낙서

1980년대 후반 연간 60만 건이 넘는 중범죄 사건으로 골치를 앓던 뉴욕시는 범죄의 온상인 지하철 범죄를 줄이기 위해 '낙서 지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직원들은 "범죄 단속은 않고 한가롭게 낙서나 지운다"며 코웃음 쳤다. 프로젝트는 강행됐고 6천 대에 달하는 지하철 차량 낙서를 모두 지우는 데 꼬박 5년이 걸렸다. 이후 지하철 범죄 발생률이 예상밖에 점차 감소하면서 1994년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이 프로젝트의 근거는 1969년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가 방치한 자동차 실험에서 결론을 얻은 범죄심리학 이론이다. 으슥한 골목길에 보닛을 열어놓은 채 방치한 두 대의 자동차 중 창문이 깨진 차에만 온갖 낙서와 파괴, 약탈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 법칙'으로 이름 지어진 이 이론은 사소한 조건의 차이에서 범죄가 유발되고 이를 방치할 경우 더 큰 범죄를 부른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가 미국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에 걸쳐 무책임성이 만연돼 있다고 고발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과 거짓 증언이 권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엔론 분식회계'메도프 사건 등 금융범죄가 연이어 터졌고, 자동차업계는 방만한 경영을 해놓고도 구제금융에 손 벌리는 상황이 됐다. 월가의 과욕은 사기 수준의 금융공학을 만들어 세계 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미국 사회 곳곳에 번진 도덕적 불감증이 미국을 망친 원인이라는 거다. 여기에 법칙을 적용해 보면 미국인의 책임의식 결여(깨진 유리창)가 미국적 가치를 훼손시켰고 세계 금융위기를 불렀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3년간 장애인 보조금을 26억 원이나 빼돌린 양천구청 사건도 그렇다. 직원 한 명이 몰래 한 일이라지만 '깨진 유리창'을 방치했기에 빚어진 일이다. 어제 조사에서는 장학금을 빼돌린 또 다른 공금횡령사건도 밝혀졌다. 관리책임을 단호히 묻지 않아 더 큰 공직 범죄를 키운 것이다. 최근 유럽 상공에서 벌어진 대한항공 화물기 소동도 이 법칙을 비켜갈 수 없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조종사들이 통신 주파수 변경이나 헤드셋 착용 등 매뉴얼을 지키지 않아 부른 결과다.

대한민국이 지금 같은 도덕 불감증과 무책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미국 짝 나지 않으란 법 없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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