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자려무나, 자장자장

객지서 쓸데없는 용쓰고 있는데 고향 老母께서 품에 안아 주시네

봄이 왔나 하여 강가로 나갔더니 봄은 아직 일러서 오지 않았고, 시퍼렇게 흐르는 강 한복판 광활하게 펼쳐진 하얀 모래밭에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선임하사가 '일동 차렷'에 '동작 그만' 명령을 내렸는지 단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그야말로 절대적인 부동자세다.

처음 보았을 때, 까마귀 떼들은 먹을 것이 없어 여러 날을 헤매다가 귀때기가 시퍼런 寒天(한천)을 향해 그 무슨 무언의 볼멘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 같았으나, 다음 순간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어떤 불의에 항거하여 침묵 시위의 결연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떻게 보면 까마귀들은 일사불란하게 가부좌를 틀고, 사생결단의 冬安居(동안거), 용맹정진의 默言(묵언) 수행을 하고 있는, 참으로 숙연한 고승들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저 무수한 까마귀 떼 가운데는 성이 이씨이고 이름이 종문인 경북 영천 출신의 까마귀도 틀림없이 한 마리 앉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 먹이고 꼴 베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잘 사는 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잘 살아보겠다고 객지로 나와, 쓸모도 없는 시를 쓴다면서 쓸데없이 끙끙 용을 쓰는 까마귀, 갑자기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이 목구멍에 울컥, 솟구쳐 올랐다.

"종문아~."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그의 이름을 힘껏 불렀더니, 그 무수한 까마귀 떼 가운데 한 마리가 공중으로 훌쩍 솟구쳐서는 두어 번 날개를 휘젓다가 다시 제자리에 풀썩 내려앉는 모습이 보였다.

'저놈이 바로 영천 촌놈이군.'

내가 다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불렀더니, 바로 그놈이 또 공중으로 날아올라 서너 번 날개를 훨훨 휘젓다가 제자리에 풀썩 내려앉는 것이었다. 급기야 나는 젖 먹은 힘을 다해 목청이 터지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쩌렁쩌렁 질렀다.

"어이, 문아, 종문아, 이종무이이이~."

그랬더니 글쎄 나의 '부름'이 그에게 '의미'가 되었는지, 바로 그 까마귀가 허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올라 훨훨 강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랴. 급기야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 전원이 그의 뒤를 따라 일제히 강을 건너와서는, 내 머리 바로 위 50m 상공에서 지름 100m의 원을 그리며 10여분간이나 하염없이 빙빙 돌다가 비슬산을 향하여 날아갔는데, 날아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놈, 그놈이 바로 이종문일 터였다.

그날 밤에 정말 이상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에서 나는 저주하는 까마귀, 투쟁하는 까마귀, 사생결단의 묵언 수행하는 까마귀가 되어 강 한복판의 하얀 모래밭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강 건너편 언덕에 기막히게 예쁜 처녀 하나가 홀연히 나타나서 있는 힘을 다해 앳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문아아아~."

내가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라 두어 번 날개를 휘젓다가 내려앉았더니, 다시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또다시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라 서너 번 날개를 휘젓다가 내려오자, 그녀의 낭창한, 그러나 목청이 터질 듯한 목소리가 다시금 겨울 강가에 애 터진 메아리로 울려퍼졌다.

"문아, 종문아, 종무나아아아~."

마침내 나는 가슴이 굵게 뛰는 벅찬 희열을 더 이상은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고 힘차게 날개를 휘저으며 강을 건너가 그 처녀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그런데 가만, 바로 그 순간에 강물보다도 천천히 흐르고 있던 시간이 갑자기 쏜살같이 냅다 치닫더니, 그 예쁘던 처녀의 얼굴이 주름살이 가득한 중년의 여인, 그것도 우리 마누라의 주름진 얼굴로 삽시간에 돌변하는 것이었다.

"아아 마누라! 다, 다, 당신이었구료."

나는 그녀의 따뜻한 품속에 막무가내로 폭삭 안겨서 천 길 만 길의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잠을 깨고 나서 부스스 쳐다보았더니, 놀랍기도 해라. 아, 글쎄 마누라는 간 데가 없고 고향의 늙으신 어머니께서 품속에 안긴 나를 그윽하게 굽어보고 계셨던 것이다.

"아니, 어머니, 어머니 아니세요."

"그래, 애미다. 좀 더 자려무나, 자장자장."

이 종 문 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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